[Why] 나도 당했다, 친했던 언니한테…

    입력 : 2018.02.10 03:02

    여성 영화감독, 동성에게 당한 성폭행 폭로… '미투 고백' 확산

    발단은 술자리
    동성애자인 영화계 선배, 만취 후배에 유사성행위 "합의하에 성관계" 주장

    여성 사이의 첫 폭로
    "서지현 검사의 용기가 나의 가슴을 두드렸다"

    미투 고백 확산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여성 영화감독 A씨에게 지난 3년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A씨는 2015년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이자 '영화계 선배'인 이현주 감독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악몽을 뒤로하고 A씨는 용기를 내 검찰에 고소했다. 이 감독이 법적 처벌을 받으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 결과 동성애자이던 이 감독은 준유사강간 혐의로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A씨가 겪는 괴로움은 끝나지 않았다. 더 커졌다.

    이 감독은 A씨의 기대와 달리 승승장구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청룡영화제에서 '연애담'으로 신인 감독상을 받은 데 이어 '여성영화인 모임'으로부터는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받았다. A씨는 이 감독이 수상 소감으로 "전혀 상 받을 생각 없이, 연말에 좋은 기운을 받겠다고 왔다"고 말하는 것을 TV로 지켜봤다. 죄를 뉘우치는 기색은 없었다. A씨는 이즈음 매일 누군가를 해치고 찌르는 꿈을 꿨다고 한다.

    지난 1일 A씨는 돌멩이라도 던지는 심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쓰고 지우기를 계속하며 몇 번을 망설였다. 그는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폭로 후 파장이 그날 이후로 내 삶을 또 한 번 변화시킬까 두려웠다. 그러나 어제 난 또 한 번 한 여성의 용기를 접했다. '피해자는 죄가 없다'는 그의 말은 나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두드렸다"고 적었다. 최근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문 폭로 이후 확산된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고백에 A씨도 다시 한 번 용기를 낸 것이다.

    믿고 따르던 언니였지만…

    이 감독과 A씨는 지난 2013년 한국 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한 동기생이었다. 친한 언니·동생 사이로 평소 생활이나 연애, 성 문제 등 여러 얘기를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이 감독이 동성애자라는 것은 A씨는 물론 한국 영화아카데미의 몇몇 교수들도 알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한 술자리였다. 2015년 4월 어느 날, 이 감독과 A씨는 수업을 마치고 다른 동기들과 함께 학교 근처 식당에서 술을 마셨다. 대구에 거주했던 A씨가 수업을 듣기 위해 3~4주에 한 번씩 올라왔기 때문에 이따금 있는 술자리였다.

    오후 11시쯤부터 시작된 술자리에서 A씨는 '남자 친구와 결혼할 계획인데, 결혼 후 영화를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기억한다. 술자리는 평소보다 길어져 이튿날 오전 7시에야 끝났다. 이날 과음했던 A씨는 술자리 끝 무렵부터는 심하게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A씨를 그대로 대구로 내려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일행은 근처에서 A씨를 잠깐 재우기로 했다. 다른 동기가 A씨를 업고 일행 모두가 근처의 한 모텔로 향했다. 여자인 A씨를 혼자 두기엔 위험하다고 여겨 같은 여자인 이 감독이 같이 있기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갔다. 이때가 오전 7시 20분쯤이었다. 이 감독이 A씨에게 유사 성행위를 한 시점은 7시 50분쯤이라는 게 검찰의 조사 결과다.

    이 감독은 A씨와의 관계가 합의로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지난 6일 보도자료를 통해 "술에 취해 잠이 든 줄 알았던 A씨는 어느새 울기 시작하더니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오열했다"며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고민을 저에게 이야기했고 그런 A씨를 달래던 중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A씨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 친구도 있었고 동성애자도 아니었다. A씨가 고소 전 이 감독에게 '내가 완전히 술에 취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합의가 됐다는 거냐'고 묻자, 그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진심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A씨가 고소 의사를 밝히자 이 감독은 A씨에게 26통의 부재 중 전화를 남기고, 일단 대화를 하자며 대구까지 찾아왔다.

    검찰과 법원은 이 감독의 주장을 거짓으로 판단했다. 모텔에 도착한 시간과 유사 성행위가 이뤄진 시간까지의 간격이 30여 분에 불과한데, 만취했던 A씨가 의식을 차리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이 감독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성폭력 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여성 간 이뤄진 첫 '미투'

    그동안의 '미투'는 대부분 남성을 향한 여성의 외침 성격이 짙었다. 이 때문에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와 같이 이분법으로 왜곡되기도 하고, 페미니즘의 연장선쯤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포털의 댓글에는 남성과 여성이 이런 문제를 두고 갈라져 다투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러나 A씨의 외침은 여성과 여성 사이의 폭로였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가해지는 폭력적 경험이 이 경우에도 그대로 가해졌다. 정근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 문제는 더 이상 남성과 여성의 시각으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며 "이를 묵인해 온 낡은 조직과 사회문화, 이에 맞서는 인권 의식의 문제가 된 것"이라고 했다. A씨 역시 "내가 이번 일을 겪으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의 요지가 '침묵하라'였다"며 "이 글을 읽고 또 한 명이 용기를 내준다면 내 폭로도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용기 있는 폭로에 사회가 반응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여성영화인모임은 이 감독에게 준 감독상을 박탈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역시 5일 이 감독의 제명을 의결했다.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는 "자체 조사를 진행한 뒤 향후 대응할 수 있도록 매뉴얼 등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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