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베트남의 별이 되다, 우리가 외면했던 '박항서 축구'

입력 2018.02.10 03:02

[베트남서 박항서를 만나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베트남의 히딩크'가 됐다… 축구감독 박항서

"잘 봐라, 내 키가 작다… 제일 싫어하는 게 공중볼이다
난 기동력 있는 축구, 빠르고 재밌는 축구 할 거다" 그렇게 면접을 통과했다
키 작은 선수들이 많은 베트남팀에 그는 '딱' 이었다

밥 먹을 땐 스마트폰 금지, 그게 내가 만든 첫 규칙이다

개인주의를 깨다
처음엔 서로 말도 안하고 휴대폰만 쳐다보더라
나도 깜빡 잊고 식당에 휴대폰 들고 가 벌금 냈다

히딩크처럼… 편견을 깨다
베트남은 체력이 약하다? 난 정반대로 진단했다
체격이 작아 민첩하니 발 빠른 축구 가능하다고

권위를 깨다
선수들하고 똑같이 먹고 격려금 나오면
주전·후보 똑같이 나눠… 그렇게 똘똘 뭉쳐 준우승

호찌민=김경필 특파원
호찌민=김경필 특파원

"그동안 많이 힘들었다."

2015년 12월 박항서 상주 상무 감독은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구단 내에서는 부대장과의 갈등으로 선수 선발 권한이 없었다. 상주 상무를 프로축구 K리그 챌린지(2부 리그)에서 클래식(1부 리그)으로 승격시켰지만, 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구단 밖에선 조롱의 대상이었다. 2014년 이광종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자 사람들은 "박항서 감독이 아쉽겠다"고 비아냥거렸다. 대표팀 선수들이 병역 면제를 받게 됐으니, 군인이 선수인 상무팀으로서는 훌륭한 자원들을 빼앗기게 된 꼴이라는 뜻이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동메달에 그치며 박 감독이 경질된 상처를 거론하면서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는 떨어질 곳이 없었다. 중국 프로팀 감독 제안이 들어왔지만, 계약 직전에 무산됐다. 야인(野人) 생활은 1년 넘게 지속됐다. 소외 계층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다 3부 리그인 창원시청 축구단 감독을 맡았다. 사람들 기억에서 '박항서'라는 이름은 지워졌다.

그사이 그는 영어로 된 지원서를 썼다. 1978년 U-20 청소년 대표, 1981년 국가대표, 2000년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2년 U-23 감독…. 선수로나 지도자로 빠질 것 없는 경력이었다. 지원서를 들고 이동준 디제이매니지먼트 대표를 찾아가 말했다. "이제 한국은 싫다. 동남아시아 팀이라도 좋으니 감독 자리를 알아봐 달라."

한국인이 AFC(아시아축구연맹) 주최 U-23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을 응원할 줄 누가 알았을까. 약체였던 베트남팀을 준우승으로 이끈 박항서(59) 감독은 그 나라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됐다. 5만 군중에게 둘러싸인 환영 인사, 다섯 시간에 걸친 카퍼레이드, 3급 노동훈장과 만찬…. 축하 인사로 정신없을 박 감독을 지난 4일 베트남 호찌민시 통낫경기장에서 만나 가장 아픈 이야기부터 물었다.

베트남에 최초의 축구 국제대회 준우승을 안겨준 박항서 감독이 지난 4일 베트남 호찌민시 통낫경기장의 VIP 대기실에서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 티셔츠를 입고 팔짱을 꼈다. 대기실 밖에는 3만명에 가까운 베트남 국민이 박 감독과 선수들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남에 최초의 축구 국제대회 준우승을 안겨준 박항서 감독이 지난 4일 베트남 호찌민시 통낫경기장의 VIP 대기실에서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 티셔츠를 입고 팔짱을 꼈다. 대기실 밖에는 3만명에 가까운 베트남 국민이 박 감독과 선수들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 호찌민(베트남)=김경필 특파원

―한국이 원망스럽진 않으셨나요.

"솔직한 이야기로 마음의 상처는 있었죠. 저를 두고 어디서는 '축구계에서 퇴출당했다' 했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밀려난 거였으니깐요. 젊은 지도자들이 자꾸 나오고 그들을 선호하는 분위기로 가고. '아, 이건 시대의 흐름인 모양이다' 생각했죠."

―축구계가 너무 야박했지요?

"지금은 축구협회도 개혁되고 있으니, 제가 조금 상처 입었던 이야기를 하기에는…. 누구나 다 자격지심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약간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고. 지금 와서는 '아이고 뭐, 그러는 모양이다' 하고 마는 거죠."

―그래도 축구를 내려놓지 않으셨네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축구뿐이었으니깐요. 어디든 저를 불러주고 기회를 주면 최선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왜 해외였나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당시 한국에선 차츰 밀려나는 상황이라 그때가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어요. 어쨌든 한번 잘 장식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는 동료, 후배 지도자를 위한 거였어요. 아시아는 넓으니까. 당시 솔직한 이야기로 중국(감독 자리)도 (한국 감독에게) 닫혀 있었거든요. 그래서 (함께 베트남에 온) 이영진 코치에게 '결과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성실하고 정말 노력한다는 것만 보여주자. 그래야 후배 감독들이 해외 진출할 기회가 늘어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단신(170㎝) 강조해 베트남 대표팀 감독으로

도망치듯 베트남으로 왔지만, 처음부터 환영받진 못했다. 베트남은 세 사람만 모여도 축구 이야기를 할 정도다. 앞서 두 명의 일본인 감독 선임이 실패로 끝난 뒤였다. 유럽 감독을 원했던 베트남 국민은 박 감독이 내정되자 "얼굴도 모르는 한국 3부 리그 감독에게 대표팀을 맡기는 게 말이 되느냐"며 반대 여론이 일었다.

―그래도 베트남 축구협회 면접을 통과하셨네요.

"제가 면접 자리에서 말했어요. '잘 봐라, 내 키 작다. (미드필드) 선수 시절 제일 싫어한 감독이 바로 내가 앞으로 갈 때마다 '항서한테 롱볼(긴 패스)로 연결시켜' 하는 사람이었다. 상대팀 키 큰 선수가 머리로 공을 따내곤 했으니까. 나는 기동력 있는 축구, 점유율 축구, 빠르고 공격적인 축구를 할 거다. 경기를 재미있게 만든다는 게 내 생각이다'라고. 베트남은 키가 작은 선수들이 많았거든요. 협회는 키 큰 선수들을 만났을 때 정신적, 전략적 대응을 궁금해했습니다."

―부임해 선수들을 보니 어떻던가요?

"오기 전에 '베트남 선수들 체력이 약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후반 30분 지나서 종료 직전에 실점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전반적으로 상체 근력이 약하고 체지방이 적다고 해요. 하지만 개인별 데이터는 전혀 없었어요."

―각 선수의 체력 자료가 없었다고요?

"체력을 측정해 보니 그렇게 약하진 않았어요. 작아도 민첩하다는 장점이 있었고요. 체격과 체력은 구분해야 하는데, 뭉뚱그려서 '베트남 선수들은 체력이 약하다' 하니까 선수들도 '우리는 약해'라는 인식이 잘못 박혀 있지 않았나 싶어요. 이번에 연장전만 내리 세 번을 했는데 체력이 문제 되진 않았어요."

박 감독은 선수 시절 차범근처럼 A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감독은 전혀 다른 자리다. 그는 베트남의 C급 선수들을 B급으로 올려놓을 줄 알았다. 편견을 깼다는 점에서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에 한 처방과 비슷하다. 히딩크 감독은 '체력과 정신력은 좋은데 기술이 약하다'는 한국 축구계의 선입견을 깼다. '기술에는 문제가 없고 체력과 정신력이 문제'라고 그는 진단했다. 이후 한국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체력을 바탕으로 압박 축구를 선보였다. 박 감독도 '베트남은 약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공격적이고 발 빠른 축구 만들기에 돌입했다.

―대표팀 분위기는 어땠는지요.

"선수들끼리 서로 말도 나누지 않았어요. 식사 시간에는 각자 휴대폰을 쳐다봤고요. 훈련 끝나면 다들 말없이 흩어졌죠. 집중력을 끌어올려야 할 경기 시작 직전에도 외부인과 통화하는 선수가 있었어요."

―당신의 선택은.

"전 '팀에 들어오면 내가 우선이 아니라 우리가 우선이다'라고 강조했어요. 규칙도 만들었죠. 아주 단순합니다. 식사 시간에 늦지 않기, 식당에 휴대폰 가져오지 않기, 버스 안에서 통화하지 않기…. 어기면 벌금을 냅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이죠. 감독, 코치도 예외 없어요. 저도 한 번 식당에 깜빡 잊고 휴대폰을 들고 온 적이 있는데, 애들이 지적해 벌금을 물었어요. 이영진 코치도 한 번 냈고. 선수들이 보기에 코칭 스태프가 하니까 믿음이 생긴 것 같습니다."

―선수들 사이에서 외국인 감독에 대한 불만은 없었나요?

"베트남에 있는 동안 가끔 나오는 음식 말고는 한국 음식을 안 먹었어요. 선수들과 똑같이 먹었어요. 이쪽 문화에 제가 젖어들려고 했어요. 예전에는 각종 행사에서 팀 앞으로 소정의 격려금이 나오면 축구협회가 챙기거나 감독, 일부 코칭 스태프가 가졌어요. 그러나 전 '내가 얼마 받았다, 나눠서 갖자'며 주장에게 말해요. 그러면 단장부터 감독, 코칭 스태프, 주전, 후보 선수 모두 같은 몫을 받아요. 혼낼 때도 여럿이 모인 곳에서 망신 주기는 절대 하지 않았어요. 해산할 때쯤 살짝 불러 '왜 이랬어? 잘못했지? 앞으로 잘해. 넌 진짜 잘할 수 있어' 말했죠. 베트남 아이들이 자존심 정말 세고 개인주의적이에요. 혼낼 때는 아프지 않게 이야기해야 해요."

―전술도 바꾸셨죠.

"배명호 코치, 이영진 코치와 상의하면서 '민첩성이라든지 베트남 선수들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자'고 했어요. 그래서 스리백(중앙 수비수를 세 명 두는 전술)으로 중앙을 두껍게 하고, 측면과 미드필더는 민첩하고 볼 키핑(공을 빼앗기지 않는 능력)이 좋은 애를 배치했어요."

―이번 대회에서 어디까지 올라갈 거라고 예상하셨었나요.

"그런 질문 많이 받았는데, 전혀 생각지 않았어요. 저희가 B조에 4번(꼴찌)으로 배정됐는데 목표 설정이 되겠어요? 우리가 우승 후보라고 한다면 특정 경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경기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준은 아니었고. 한 경기 한 경기를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었어요."

―매 경기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겠네요.

"한 경기 한 경기, 토막토막, 앞만 보고 갔어요. 그래서 여섯 경기를 치렀는데 실제로 뛴 선수가 열댓 명밖에 안 돼요. 왜? 그 애들이 주축이기 때문에. 누구를 돌리고 그럴 수가 없었어요."

5시간 동안 그를 기다린 베트남 총리 지난달 28일 베트남으로 돌아온 박항서 감독이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공항에서부터 이어진 열광적인 환영 때문에 총리 예방이 5시간 가까이 지체됐지만 푹 총리는 “매우 기뻐하며 기다렸다”고 했다.
5시간 동안 그를 기다린 베트남 총리 지난달 28일 베트남으로 돌아온 박항서 감독이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공항에서부터 이어진 열광적인 환영 때문에 총리 예방이 5시간 가까이 지체됐지만 푹 총리는 “매우 기뻐하며 기다렸다”고 했다. / 베트남 정부

1978년과 2002년, 그리고 2018년

인간 박항서에게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언제일까. 그가 열광적인 카퍼레이드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78년 10월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 준결승에서 남한팀은 북한팀을 상대로 승부차기 6대5의 승리를 거뒀다. 남한 축구가 처음으로 북한 축구를 이긴 날이다. 당시 남한팀 주장이자 승부차기 1번 키커가 박항서였다. 당시 축구협회는 김포공항에서부터 서울시청까지 화물 트럭(승용차 오픈카를 구하지 못했다)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1978년과 2002년, 그리고 올해까지 박 감독님의 결정적 순간에는 늘 승부차기가 있었네요.

"1978년은 너무 오래전이고 얼떨떨했었죠. 기억이 잘 안 나요. 벌써 40년 전인 걸요. 이번 승부차기할 때 예전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그냥 미리 승부차기를 연습하고 갔지요. 이영진 코치랑 선수 세팅을 어떻게 할 것인지 준비했고요. 승부차기는 경험이 많고, 심장이 강한 사람. 즉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좋아요. 이런 선수들로 선별해놨지요."

―매 경기 승부차기를 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아니요.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데 준비는 해야 하니까요. 조별 리그 통과하고 나서 이라크하고 경기하기 전날 우리는 승부차기 연습을 했어요.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은 모두 준비해야 하니까요."

―지금까지 축구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2002년과 지금, 두 가지 다 저한테는 평생의 영광이죠. 2002년에는 히딩크 감독님을 모시고 홈에서 지도자로서 큰 경험을 했던 거고, 이번에는 외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우승은 못 했지만 사랑받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포항, 경남, 전남, 상주, 창원시청 시절 다 저한테는 소중해요. 어떻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슬플 때도,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다 추억입니다."

나를 알아봐 주는 곳 간절히 찾아라

박 감독의 계약 기간은 2년. 이제 넉 달이 지났을 뿐이다. 2019년 말까지 베트남 대표팀을 이끌어야 한다. 베트남 축구 팬들은 인내심이 많지 않은 편이다. 이번에 한껏 높아진 눈높이에 맞는 성과를 계속 보여주지 않으면 언제 돌아설지 모른다. 올해에도 8월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11월 스즈키컵(동남아축구선수권대회)이 예정돼 있다.

―베트남 국민의 기대가 높겠습니다.

"사랑받은 만큼 돌려 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죠. 이번이 축구 인생에서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해외 생활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저한테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은 참을 각오가 돼 있었어요. 막상 와 보니까 외로울 것도 없어요. 이영진 코치, 배명호 코치가 같이 있고, 집사람도 한국에서 왔다 갔다 하고. 문화도 비슷하고, 음식도 그렇게 다르지 않고.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것저것 보고 듣고 하는 이야기가 많아서 시끄러운데, 여기서는 베트남어를 잘 모르니까. 신문도 못 읽죠, TV도 못 보죠,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들리는 게 별로 없죠. 저절로 축구에 '올인'이 돼요. 축구에 집중할 수 있으니 훨씬 더 좋은 거 같아요."

―한국에 계신 어머니께서는 걱정이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우리 어머니가 연세가 엄청 많아요. 100세가 다 돼 가세요. 제가 (베트남) 간 것도 잘 몰라요(웃음)."

―해외에서 미래를 찾다니 아직 청춘이십니다.

"20대 젊은이나 은퇴 준비할 만한 나이대 사람들이나 처지는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능력은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는데 나이 때문에 기회가 제한되지요. 그런데 또 그러면 기회가 있는 곳, 나를 알아봐 주는 곳을 간절하게 찾으면 돼요. 간절한 만큼 성과는 만들어지더라고요."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