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위대한 소녀는 위태로움에 서 있다

  • 김현진 소설가

    입력 : 2018.02.10 03:02

    [김현진의 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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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소녀들은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돼도 다시 소녀를 연기해야 한다. 주위 사람들은 이런저런 가면을 내밀며 그에 맞는 연기를 해보라고 요구한다. 가면을 내미는 사람도, 가면을 쓰는 그녀도, 소녀로서의 정체성은 잃지 말라고 한다. 여러 가면을 바꿔쓰는 소녀를 만드는 세상, 빨간 머리 앤의 주근깨 얼굴 미소를 다시 찾는다. /넷플릭스
    요즘은 언뜻, 소녀들이 무진장한 각광을 받는 것만 같다. 어디서는 이 주의 소녀, 혹은 이달의 소녀처럼 일정 기한을 정해 그 기간을 대표하는 소녀를 뽑을 정도다. 그러나 그렇게 각광받는 소녀가 되려면, 절대적으로 무해(無害)해야 한다. 남성 아이돌들은 해가 갈수록 각이 잡히는 춤을 추고 점점 멋져지건만 여성 아이돌들은 갈수록 연령대가 내려가는 것은 물론, 비교적 성숙한 연령대에 진입했더라도 몇 살이 되었건 '샤샤샤'하는 식의 애교를 강요당한다. '후려치기' 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성 아이돌들은 갈수록 어려지고, 어려져야 하며, 귀여워지고 또 무해해진다. 스무 살이 넘은 지 한참 된 여성들도 세상의 구미에 가장 잘 맞는 형태의 교복을 입고 무대에서 깜찍한 댄스를 선보이는 따위의 풍경은 너무 흔해서 놀랍지도 않다. 이 재능 있는 소녀들이 이른바 '남돌'들의 춤을 간혹 있는 장기자랑에 선보이는 강렬한 모습을 보면 그것이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서 좀 심하게는 참담한 마음까지 든다.

    이렇게 소녀라는 단어가, 요즘 고생 참 많이 한다. 유명한 TV 프로그램 중에는 모두 알다시피 101명의 소녀들이 과거 미스코리아가 텔레비전에 중계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얼굴과 몸매, 성정과 실력을 모든 측면에서 평가받았다. 그렇게 가혹한 잣대를 통해 우리 사회는 자꾸만 소녀들을 선발하고 새로운 소녀들을 소환한다. 그런 소녀가 되려면 바늘귀보다도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무해하고, 애교스럽고, 섹시하되 자신이 섹시한 것을 알아서는 안 되며, 성적으로 매력적이되 성생활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고, 사랑스럽고 가녀리면서도 아재 음식을 좋아하며 결코 살이 찌지 않는 소녀, 그리고 입이 찢어져라 고기쌈을 입안에 밀어 넣지만 결코 살이 찌지 않으며 부러질 것 같은 팔다리를 하고도 체육 대회나 남성이 받는 군사 훈련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소녀.

    소녀들은 옛날부터 여러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지만, 지금의 한국에서 소녀가 소비되는 방식처럼 기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넷플릭스에서 제작 방영하는 '빨간 머리 앤'에서 오랜만에 상쾌한 소녀들을 보았다. 그대로 '빨간 머리 앤'을 옮긴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원작에 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각색을 하여 더욱 흥미롭다. 이 많은 소녀 중 당신의 소녀는 누구인가? 이를테면 '작은 아씨들'? 영화판에서는 장차 '다크 나이트'가 될 남자, 크리스천 베일이 해사하고 연약한 옆집 귀족 청년 로리 로렌스를 맡고 있어 조금 우습기도 하다. 남북전쟁 때문에 입대한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의 '다음에 만날 때까지는 모두들 작은 아씨들이 되어 있기를'이라는 강령에 따라 모두들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천로역정을 매뉴얼 삼아 밤낮 분투하는 소녀들의 모습은 왠지 우스꽝스럽고 귀여운데 우리가 어릴 적 본 '작은 아씨들'은 소녀 시절만 기록한 축약판이라 교훈적인 면만 강조되어 이들의 인간적인 모습은 별로 볼 수 없다. 삭제된 장면. 갸륵하게도 다친 아버지를 보러 가는 어머니의 여비를 위해 아끼는 머리채를 잘라 판 조가 침대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메그가 "울지 마, 아버지는 곧 나아지실 거야"라고 위로하자 "난 내 머리 때문에 그러는 거야"라고 대꾸하는 광경은 모범의 화신들보다 한층 친근한 느낌이다. 맏딸 메그 역시 삽질에서는 동생에게 지지 않는다. 또래 총각인 부르크 선생이 은근히 마음에 들지만 막상 그의 청혼은 마구 튕기면서 뻐긴다. 때마침 방문한 마치 할머니가 다짜고짜 메그에게 "저런 놈과 결혼할 생각이냐"라고 야단치며 흥분하자 갑자기 "내 결혼은 내가 하는 거예요"라고 같이 발끈한다. 사실은 전혀 그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단지 '개기다가' 그만 그와의 약혼에 이르고야 만다. 언니가 당연히 능글맞은 구혼자를 격퇴했을 것이라 믿었던 조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두 사람의 러브신이 펼쳐지고, 뛰쳐나와 "누가 이리 와 봐요. 부르크가 메그에게 이상한 짓을 하고 메그가 그걸 좋아하고 있어요!"(!!)라고 생생하기 짝이 없는 표현으로 고래고래 고자질하지만 아무도 동조해 주지 않고 되레 새로운 커플을 축복하자 조는 다락으로 뛰어가 충직한 쥐들에게 이 슬픔을 하소연한다.

    주인공답게 조의 기박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속편 '행복한 신부들'에서 "나는 누구 신세를 지는 것 따위는 딱 질색이야"라고 가족들에게 토하는 열변을 친지들이 듣는다. 하필 조의 오랜 꿈인 유럽 여행 동반을 제의하러 찾아온 참이다. "신세 지는 것이 저렇게 싫다니 어쩔 수 없겠군…"이라는 상황이 전개되며 행운을 잡은 것은 엉뚱한 막내 에이미. 조에게 걷어챈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도피성 유럽 여행을 떠났다가 에이미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뒤 집으로 돌아온 로리는 조에게 고백한다. "내 마음속에서 너와 에이미는 한 사람과도 같아." 갓 결혼해서 처음 처가를 방문한 새신랑이 처형에게 하는 말치곤 참으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임성한 스타일의 막장 드라마 따위는 이미 이때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이만하면 어린이 명작은커녕 치정소설의 반열에 올라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터인데, 메그가 돈 없는 가정교사한테 시집가서 밤낮 살림에 허덕거리는 모습이 리얼한 것을 보면 어쩌면 진정한 성장소설 같기도 하다. 소녀들에게 '자 봐라. 이런 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하는….

    작은 아씨들
    전편에서도 죽을 고비를 넘겼던 베스는 로리에 대한 아무도 모르는 외사랑을 품고 상사병으로 끝내 세상을 뜬다. 죽기 전에 '왜 다들 집을 떠나려고만 하지? 언제까지나 같이 살면 좋을 텐데. 나는 집이 가장 좋아'라며 호러 영화 분위기로 섬뜩하게 중얼거리는 장면은 '나는 죽어서도 집이 좋아'라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집귀신으로 재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이 오싹하다. 어쨌거나 결국 우리의 조세핀 마치는 주변의 경악을 뒤로하고 한참이나 연상의 프레드릭 선생이라는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소녀란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빨간 머리 앤'의 몽고메리가 쓴 다른 작품인 '에밀리'의 한 구절로 마무리하자. 열렬한 작가 지망생 에밀리 스타는 격한 성격의 단짝인 아일즈 번리와 종종 다투곤 하는데, 어느 날 장난감 집 문제로 다투다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아일즈는 에밀리에게 말한다. "내가 너보다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면 목을 매달아 자살해 버리겠어." 에밀리는 대답한다. "내가 네게 밧줄 살 돈을 보내주마." 다시 한 번, 소녀란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멋진 존재다. '샤샤샤'에 살랑살랑 대는 안무를 하던 소녀가 음악이 바뀌면 눈빛이 바뀌면서 한다 하는 남성 아이돌의 강력한 춤을 너무나 가볍게 소화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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