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굽, 안녕 투박한게 좋아

    입력 : 2018.02.09 03:03

    [최보윤 기자의 럭셔리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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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식스 한정판 제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아식스 제공
    "드디어 내가 굽을 버리는 시대가 오는구나!"

    '걸어 다니는 패션지'라는 별명의 한 선배가 얼마 전 발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라던 15㎝ 높은 굽 대신 투박한 스타일의 운동화가 신겨 있었다. "이게 없으면 어디 나가서 대화가 안 되는데 어쩌겠어. 키냐 패션이냐 그 어려운 선택의 늪에 내가 빠져버릴 줄 몰랐지. 정말 아빠 신발 빌려 신은 것 같은 이런 운동화가 궁극의 패션 상징이 됐다니 그게 아이러니야."

    나이키 더 텐. /나이키 제공
    몇 년 전 '운도녀(운동화를 신고 출근하는 도시 여성)'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운동화는 '편리하다'는 측면이 더 강조돼왔다. 시계를 좀 더 앞으로 돌려 1990년대 나이키 에어조던, 리복 펌프 같은 신발이 인기를 끌었을 때도 주로 기능성에 주목했다. 유행이라 해도 학생들 사이의 전유물 같았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패셔니스타의 상징이 됐다.

    지난 5일 벌어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풍경을 보자. 체감 온도 영하 15도의 송곳 추위가 기승이던 그때. 롱패딩과 핫팩으로 무장한 이들이 줄을 이었다. 아식스의 '젤-버즈1' 판매를 하루 앞두고 팬들이 몰려들어 밤샘을 벌였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키코 코스타디노프와 아식스가 손잡고 내놓은 제품으로 36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가격에도 서로 사겠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전 세계 한정 수량 출시된 제품으로 분더샵 케이스스터디 매장에 들어오자마자 15분 만에 완판 됐다. 요즘 인기라는 옛날 디자인의 재해석이 팬들을 사로잡았단다.

    나이키 더 텐. /나이키 제공
    나이키와 오프화이트가 손잡은 '더 텐'의 인기를 보면 일부 마니아에 그치는 수준은 이미 넘어선 듯하다. 지난해 11월쯤 국내 소개됐을 때 600족 한정 판매에 인터넷 접속은 150만명. 매장에선 2만명 넘게 모여 '필수 소장' 운동화의 명성을 확인했다. 오프화이트를 만든 버질 아블로의 감각도 한 몫 했지만 '에어맥스' '조던' '베이퍼맥스' 등 과거 인기 모델을 추억하는 이들의 열망이 대단했다. 이들에게 운동화는 일종의 인생의 훈장이자 종교다. 미국 칼럼니스트 조젠 커밍스가 GQ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수집한 에어 조던 시리즈는 나의 성공을 대변하는 바로미터같아요. 내가 이만큼 잘 살고 있구나를 느끼죠. 어린 시절 나의 결핍에 보상하는 기분도 들고요." 갖고 싶어도 비싼 가격에 돌아서야 했던 과거에 추억하며 나에게 주는 상이란 얘기다. 이토록 세련된 소유욕이라니! 운동화, 이젠 단순한 패션이 아니다. 정서적 반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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