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온 버럭 영감… "한국인, 北을 늘 화난 외삼촌처럼 여겨"

    입력 : 2018.02.09 03:03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놀라울 정도로 느긋해…
    핀란드 베스트셀러 주인공 괴짜 노인 그럼프
    '뚱뚱한 소년' 김정은에 "핵 위협 멈추라" 편지

    투오마스 퀴뢰

    한국에 온 괴짜 노인 그럼프

    투오마스 퀴뢰 장편소설|따루 살미넨 옮김|세종서적|212쪽|1만2800원

    투오마스 퀴뢰<사진>는 핀란드 국민 500만명 중 50만명이 읽었다는 '괴짜 노인 그럼프' 시리즈로 유명한 소설가다. 그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소재 삼아 지난해 10월 핀란드 현지에서 발표한 작품이 '한국에 온 괴짜 노인 그럼프'. 겨울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핀란드인에게 동계올림픽 개최국 이야기가 주목받을 것이란 생각만으로 쓴 것은 아니다. 세계가 하나 되는 축제 마당이면서도 북핵 갈등의 폭심(爆心)이 되어버린 한반도의 모순된 상황이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작가는 지난해 8월 취재를 위해 3박 4일 일정으로 방한했다. 여름이지만 털모자와 장화로 그럼프 분장을 하고 서울과 평창, 강릉을 둘러봤다. 그때 찍은 사진 수십 장도 책에 수록했다. 반팔 차림 한국인 사이에서 손에 태극기를 든 채 겨울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냈다.

    주인공 그럼프는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면 짜증을 내는 버럭 영감이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도 "리듬 있게 볼일 보라는 건가? 사람들을 화장실에서 빨리 나가게 해야지…"라고 투덜댄다. 하지만 이산가족을 만나 아픈 사연을 들을 땐 막걸리·소주를 통음(痛飮)하다가 필름이 끊기고 마는 다정다감한 남자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새파랗게 젊은 친구가 권력을 잡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기분이 나빠졌을 뿐, 한반도엔 아무 관심도 없던 그럼프가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서울로 유학 간 손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평창올림픽조직위 소속 남녀에게 노르딕 스키에 대해 설명했다가 그들로부터 올림픽 시설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털 모자 쓰고 광화문 광장에 선 그럼프. 작가 투오마스 퀴뢰는 지난해 8월 서울과 평창 올림픽 경기장 등을 방문했다.
    털 모자 쓰고 광화문 광장에 선 그럼프. 작가 투오마스 퀴뢰는 지난해 8월 서울과 평창 올림픽 경기장 등을 방문했다. / 세종서적
    평창의 150m 스키점프대를 찾아간 그럼프는 올림픽이 열리면 그 자리에 서게 될 선수들 마음을 상상하며 '핵무기 버튼을 누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짐작한다. 그런데도 '뚱뚱한 소년과 엉덩이 큰 대통령이 버튼을 누르면 무엇이 전부 파괴될 것인지'라며 미국과 북한의 자제를 바라기도 한다.

    서울로 출발하기 전, 그럼프는 손녀에게 전화를 걸어 '공중에 폭탄이 날아다니거나 길거리에서 공격용 소총을 든 남자들이 보이지 않는지' 묻는다. 한반도 위기를 보는 나라 밖 시선이 어떤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손녀는 한국인들이 '김씨 가족을 늘 화가 난 외삼촌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외국인이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느긋한 한국인의 북핵 대응을 촌철살인의 비유로 지적한 것이다. 핵위협과 대화 카드를 번갈아 꺼내 드는 북한에 휘둘리는 우리 모습을 반성하게 하는 대목도 있다. '독재자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한다. 독재자가 평화를 약속하면 당장 내일부터 전쟁이라는 뜻일 수 있고, 당장 내일부터 전쟁이라고 위협하면 자기 나라 안에 큰 문제가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소주와 김치를 좋아하고 태권도를 3년간 배웠다는 작가 퀴뢰는 소설 곳곳에서 한국에 대한 친밀감을 드러낸다. 그럼프는 자신을 평창으로 안내한 '이씨'로부터 6·25 전쟁 이야기를 들으며 소련과 치른 전쟁(1939~1944) 때문에 핀란드가 겪었던 고난을 떠올린다. '작가의 말'에 퀴뢰가 쓴 그럼프 세대에 대한 설명은 한국을 전쟁의 폐허에서 일으켜 세운 이들에 대한 찬사로 읽어도 무방하다. '1930년대에 태어났으며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성장했고, 가난한 시절을 보냈으며 국가를 재건한 인물(…) 그들이 사는 동안 농업 국가였던 핀란드는 첨단 기술의 나라가 됐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그럼프가 들었던 음악은 존 레넌의 '이매진'이었다. 노래는 전쟁·소유·가난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하지만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세상은 요원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꿈 같은 일이 일어난다. 김정은이 돌연 태도를 바꿔 핵위협 중단과 세계를 향한 단계적 개방을 약속하고 나선다. 소설은 그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럼프가 '뚱뚱한 소년에게'라는 제목으로 김정은에게 마음을 바꾸라며 보낸 충고 편지가 미약하나마 근거로 제시돼 있을 뿐이다.

    올림픽이 시작됐다. 하지만 북핵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하고 진실의 순간은 잠시 유예된 듯하다. 작가는 이처럼 숨막히는 상황에서 축제를 여는 한국인을 위로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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