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사막에 돈줄을 대다" 러시아 이민자에서 미술계 파워우먼 된, 야나 필

    입력 : 2018.02.14 06:00 | 수정 : 2018.02.14 08:17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 CEO 야나 필(Yena Peel)
    구소련에서 성장해 3번 이민… 골드만삭스에서 미술계로 점프
    부호들의 자선 파티로 예술가 후원, 올 2월부터 이우환 조각 작품 전시

    세계 미술계를 움직이는 열정적인 키우먼(Key Woman) 야나 필. 그녀는 다보스 포럼의 젊은 글로벌 리더이며 공개 토론회인 인텔리전스 스퀘어 그룹(Intelligence Squared Group)공동 의장이기도 하다. /사진=성형주 기자
    야나 필의 정체를 단숨에 요약하기는 어렵다. 첫인상만 보면 슈퍼 모델 크리스티 털링턴을 닮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낙관적인 성품과 넘치는 스테미너에 할리우드 여배우 샌드라 블록과 수다를 떠는 느낌이다. 그녀는 트위터 프로필에 자신을 ‘activist/addict/agitator. techno-optimist. friend of fashion’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녀는 ‘연결자'다. 미술과 돈, 예술과 테크,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융합시켜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내는.

    현재 그녀의 대표 직함은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의 CEO다. 런던 중심부 하이드 파크 켄싱턴 가든에 있는 서펜타인 갤러리는 현대 미술의 허브로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전시 플랫폼 중의 한 곳. 만 레이, 헨리 무어,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이 전시회를 열었고, 2000년부터 매년 장 누벨, 자하 하디드 등의 건축가들이 임시 파빌리온을 건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런던과 홍콩을 오가며 금융의 다리를 놓는 이 통찰력 있는 행동가를 만났다. 그녀는 아니시 카푸어에 이어 올해 2월부터 서펜타인 갤러리에 야외 마당에 전시되는 이우환의 조각 작품을 홍보하기 위해 내한했다.

    -당신은 돈과 기술에 목말라하는 현대미술가들 앞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예술가들은 전시회 오프닝을 제외하고는 후원자나 컬렉터를 만날 기회가 없다. 나는 재능과 돈을 연결하고 싶었다. 시작은 영국 건축계의 대가인 노먼 포스터 남작의 집에서 열린 파티였다. 예술가와 금융가, 기술과학자들을 50명 정도 초대했다. 가령 벤처캐피털의 대부 로널드 코헨 경 옆에 혁신적인 도예가이자 복장도착자인 그레이슨 페리를 앉히는 식이었다. 참석자들은 매우 재미있어했고 파티는 히트를 했다.

    그 뒤 자선 파티에서 나온 돈으로 영국 예술 재단인 테이트 컬렉션을 대신해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현대미술 100점을 인수했다. 터너상 수상자인 영국 감독 스티브 맥퀸의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 기금도 마련했다. 지금은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매년 여름 시즌 샤넬과 함께 매혹적인 갈라 쇼를 진행한다. 서펜타인 갤러리의 자선 파티는 미술계에서 아주 유명하다(웃음).”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눈을 맞추고 얘기하는 야나 필./사진=성형주 기자
    야나 필은 197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냉전 시대 구소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캐나다로 이주해 맥길대학에서 현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와 동문수학했다. 이스라엘 헤지 펀드를 거쳐 골드만 삭스에서 일하면서 2003년 유명한 아트 펀드인 아웃셋 컨템퍼러리로 예술 후원의 새로운 모델을 발명했다. 상류층 귀족과 정·재계 인사, 금융계 큰 손들과 예술가들 연결하는 이 자선 파티는 수많은 박물관과 예술가들에게 자금줄을 대며 회생의 기회를 주었다.

    -이력이 독특하다. 성공한 이민자의 삶이다.

    “내 아버지는 엔지니어, 어머니는 패션계 일을 했고, 나는 러시아의 문학과 인문학을 전공했다. 나는 3번이나 이민을 다녔다. 4살 때 러시아를 떠나왔고, 캐나다에서 자라나 대학 졸업 후, 영국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살다가 결혼 후 홍콩에서 7년 동안 살았다. 남편은 영국 사람이고, 딸과 아들은 중국말을 할 줄 안다. 우리 가족은 굉장히 글로벌하다. 세상을 폭넓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글로벌한 감각과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없이 이동 중이라는 성장 환경이 인생의 방향 설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부모님의 삶은 이민자로서 굉장히 고단했다. 그래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일하고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것이 내 인생 모토가 됐다. 내 가족은 엔지니어, 수학자, 은행원, 골드만삭스에서 일한 나를 포함해 다양한 분야에 도전해왔기에 이민자 가족이 겪는 전형적인 삶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끝없이 이주하는 내 삶 자체가 문화와 상업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 셈이다.”

    -국외자 또는 아웃사이더가 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연결자'로 그 경험을 증폭시켰다.

    “다행히 나는 호기심이 많다. 처음부터 좁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술도 그렇다. 미술 관련 일을 하고 있지만, 영역을 국한시키지 않고 건축가, 음악가, 문학가와 다양하게 교류한다.”

    -골드만삭스에서 일할 때는 어땠나?

    “골드만삭스에 있을 때도 아트 펀드 관련 일을 했다. 당시 사우스뱅크에 살면서 테이트 모던을 자주 방문했다. 영국 개념미술의 대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이나 찰스 사치가 후원했던 젊은 영국 아티스트 그룹에게 큰 영감을 받았다. 실력 있는 큐레이터와 예술가들이 늘 주변에 있었고 그 자장 안에서 떠난 적이 없었으니 다행이다.”

    -올 2월부터 서펜타인 갤러리는 이우환 작가의 조각을 전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CEO가 된 이후 첫 조각 전시를 이우환으로 택한 이유는?

    “이우환 작가의 작품은 아름답다. 미니멀하고 영적일 뿐 아니라 매우 영국적인 기품을 지닌 작품이다. 우리 갤러리는 영국에서 대단히 상징적인 비영리 갤러리다.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도움으로 생기를 되찾은 이후 미술계와 정·재계 상류층 인사들의 후원은 물론 일반 시민의 크나큰 사랑을 받고 있다. 1년 동안 약 120만 명의 시민들이 찾아오는데, 이우환의 작품은 가든에 매우 잘 어울린다. 아니시 카푸어에 이은 작품으로도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

    -다른 한국작가들은 알고 있나?

    “이불과 서도호를 좋아한다. 파격적이면서도 깊은 철학을 담고 있다. 그들만의 예술 세계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웃음).”

    한국 작가를 많이 아는 이유는 그녀의 남편 스티븐 필(Stephen Peel)이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조정 경기 선수로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아쉽게도 4등 했지만, 그 이후로 한국 예술품을 사랑하게 되었다.”

    -현대미술에 애정이 큰 것 같다.

    “미래는 항상 과거의 향수로부터 온다. 익숙한 과거에서 현대미술의 새롭고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출발할 수 있다. 나는 현대미술 중 특별히 디지털 기술을 예술 작품과 결부시키는 일에 관심이 많다.”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인 것처럼, 한국 설치 미술작품의 기술적인 기반이 훌륭하다. 알고 있나?

    “물론. 그래서 한국에 있는 기술 기업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많다. 지금 나는 예술가들에게 AI와 관련된 기술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현재 내게 가장 중요한 키워드도 테크놀러지다. 기술이 예술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 디지털 시즌을 맞아 나는 최고로 독창적인 전시회를 열고 싶다. 현재 서펜타인 갤러리에서는 VR을 통해 자하 하디드의 페인팅과 그림도 전시 중이다.”

    야나 필은 솟구치는 아이디어와 넘치는 스케줄을 주체할 수 없어 약간 하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올해 5월 베이징 공개할 파빌리온 프로젝트도 동시에 추진 중이다. 파빌리온은 야나 필의 혁신적이고 친밀한 친구였던 자하 하디드가 해왔던 작업. 런던이 아닌 해외에서 아시아 건축가와 작업하는 것은 첫 시도다.

    2018년 2월부터 7월까지 서펜타인 갤러리 야외 공간에 전시 될 이우환 조각 작품. 야나 필이 2018년 가장 기대하는 전시다. 서펜타인 갤러리는 연간 12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다.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사는 듯하다. 에너지는 어디서 얻나?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라고나 할까(웃음).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정말 열심히 산다. 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가 가장 큰 힘을 준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 엄마가 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자랑스러운 경험이다. 워킹맘 CEO라서 에너지가 더 많아야 하지 않겠나.”

    -이번 한국 방문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다 얻었나?

    “한국에 올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 사람도 공기도 에너지가 꽉 찬 나라다(웃음).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자 총괄 큐레이터인 김선정에게서도 전시와 작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곧 서펜타인 갤러리가 50주년을 맞는데, 이번 방문으로 50년 후까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열쇠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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