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홀로코스트 관여 부정' 법안 승인…이스라엘과 갈등 고조

입력 2018.02.07 16:36

안드레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6일(현지 시각)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에 폴란드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내용의 법안을 최종 승인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입법에 항의해 온 이스라엘과의 외교 갈등이 심화될 전망이다.

워싱턴포스트(WP) 등은 두다 대통령이 이날 법안에 서명하며 “헌법재판소에 회부해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 준수를 침해하는지 여부를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홀로코스트 법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폴란드인들의 책임을 묻는 발언을 규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해 논란이 일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앞서 지난달 28일 법안이 폴란드 하원을 통과한 직후 “이스라엘은 진실 왜곡과 역사 수정, 홀로코스트 부정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 ‘홀로코스트 법안’ 발효 코앞…두다 대통령 “폴란드도 나치 피해자”

홀로코스트 법안의 핵심 내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뒤 설치한 강제 수용소 등을 부를 때 폴란드와의 연관성을 암시하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적용되며, 법을 위반할 경우 벌금 또는 최대 징역 3년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폴란드 남부 마우폴스키에주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지은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다. / 블룸버그
흔히 ‘폴란드 죽음의 수용소’로 불리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가 대표적인 예다. 폴란드 정부는 이같은 표현이 폴란드와 폴란드 국민의 적극적인 홀로코스트 가담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마테우스 모라비에스키 폴란드 총리는 “이 법은 폴란드가 나치에게 점령됐던 상황인데도 (폴란드 내 강제 수용소에서) 나치가 한 행위에 폴란드 국민 전체가 일종의 책임이라도 있는 듯이 거론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인들도 나치에 학살 당했는데, 홀로코스트를 거론하면서 폴란드와 폴란드 국민을 나치와 동급으로 연결시키는 건 억울하다는 것이다. 폴란드 국립추모연구소(IPN)에 따르면 나치에 학살된 폴란드인은 유대인 300만명을 포함 총 6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두다 대통령은 나아가 “개개인의 경우 협박에 못 이겨 가담한 경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폴란드인들은 체계적으로 홀로코스트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는 폴란드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폴란드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PiS)’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했던 ‘폴란드 지하국가’ 등을 부각했다. 폴란드 지하국가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지하며 반(反)나치 봉기를 위해 준비하거나 나치에게 교육을 금지당한 폴란드 국민들을 위한 고등교육기관 등을 세웠던 지하 저항운동 조직들을 집합적으로 이르는 용어다.

◇ 학계, 폴란드 ‘역사 왜곡’ 비난…“민족주의 지지층 위한 정치적 수단” 지적도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홀로코스트 법안 입법이 나치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폴란드의 역할을 감추려는 시도라고 비난했다. 당시 일부 폴란드인들은 나치의 압력 없이도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1941년 7월 폴란드 동부 예드바브네 지역에서 폴란드 주민들이 약 1600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 한 예다.

안드레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2015년 5월 24일 대선 최종 개표 결과 직후 지지자들에게 승리의 브이를 그려 보이고 있다. 두다 대통령은 반(反)유럽연합(EU)을 표방하는 극우 보수 성향의 ‘법과 정의당(PiS)’ 소속이다. / 블룸버그
최근 폴란드에 부는 민족주의 바람을 겨냥한 정치적 수단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폴란드 인권단체 ‘네버어게인’은 “(홀로코스트 입법이) 민족주의에 관한 것이자, 민족주의적 역사를 강요하는 일”이라며 PiS가 폴란드의 영웅적인 과거사를 강조해 장기집권을 노리고 있다고 했다. 민족주의와 반(反)이슬람 성향으로 알려진 PiS가 2015년 총선에서 압승한 데에는 20~30대의 몰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유태인위원회(AJC)는 폴란드 정부가 제시한 지침 또한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폴란드 정부는 예술작품이나 역사적 자료에 포함된 표현은 홀로코스트 법안의 제재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AJC는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다”며 “표현이 예술적이거나 학문적인지는 누가 정하느냐”고 꼬집었다.

이스라엘측은 이 법안이 시행되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폴란드인의 전쟁범죄 연루와 관련한 증언을 할 경우 기소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와 관련 모라비에스키 폴란드 총리와 직접 통화하기도 했다.

◇ 이스라엘 “헌재 결정 기다리겠다”…미국, ‘관계 악화’ 경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2017년 12월 11일(현지 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외무장관들과의 회동에서 발언하고 있다. / 블룸버그
두다 대통령의 최종 승인 소식에 이스라엘은 일단 폴란드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스라엘 외교부는 이날 “폴란드 정부와 계속해서 소통하겠다”며 “두다 대통령의 헌법재판소 회부 결정으로 양국이 변화와 수정에 합의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집권당인 PiS의 영향력 아래 있어 법안이 실질적으로 수정될 가능성은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트르 부라스 유럽외교협회(ECFR) 대표는 “현 형태의 폴란드 헌재는 집권당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고 설명했다.

법안은 헌재의 결정이 나오기 전 시행될 가능성이 커 헌재 회부는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법안은 앞으로 2주 이내 시행될 예정이다.

이스라엘과 동맹관계인 미국은 두다 대통령의 결정에 “실망스럽다”고 밝혔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이날 홀로코스트 법 제정이 “표현의 자유와 학문적 연구의 자유에 불리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미 국무부는 홀로코스트법 제정이 폴란드와 미국의 관계를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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