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재용 사건, 피해자를 범죄자 만든 것 아닌가

조선일보
입력 2018.02.06 03:20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353일 만에 석방됐다. 전직 삼성 임원 4명도 모두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앞서 1심은 최순실 측에 대한 삼성의 승마 지원 등에 대해 개별적이고 구체적 청탁은 없었다면서도 '묵시적(默示的) 청탁'은 있었다는 이유로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 실형을 선고했다.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라는 현안에 관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속 청탁'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판사가 증거가 아니라 다른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속 청탁'을 발견했다는 것은 다시는 있어선 안 될 판결이었다.

이런 무리한 판결은 2심에서 대부분 바로잡혔다. 2심은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청탁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했다. 실제 제시된 증거가 없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나 삼성생명 금융지주사 전환이 순전히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때문에 진행됐다고 볼 수 없다고 했고, 박 전 대통령이 삼성 승계 작업 추진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했다. 청탁을 하지도 않았고 할 상황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마음속 청탁'의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사건을 처음 수사했던 검찰은 사건 성격을 '박 전 대통령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정리했었다. 그걸 특검이 '뇌물 사건'으로 방향을 틀었다. 박 전 대통령에게 더 심한 형(刑)을 가하려고 사건 구도를 바꾼 것이다. 그런데 뇌물이 성립되려면 뇌물을 준 사람이 있어야 한다. 강요당한 사람이 갑자기 뇌물 공여 범죄자로 바뀌었다. 희생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기업들을 겁박하고 강요한 사건을 기업의 뇌물 상납으로 바꾸기 위해 정부는 고비마다 재판에 개입했다. 청와대는 재판 도중 캐비닛 문건을 찾아 특검을 통해 법원에 제출했고, 공정거래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증언대에 서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특검은 이 사건을 "정경 유착의 전형"이라고 했지만 2심 재판부는 "권력과의 뒷거래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나 불법·부당 대출 등 전형적인 정경 유착의 모습을 이 사건에선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 억지로 '정경 유착' 모양을 만들려고 했다면 수사가 아니라 정치 공격이다.

이 사건 본질은 애초부터 강요 내지 공갈에 가깝다는 견해가 많았다.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이득을 주려고 기업들을 겁박했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했다면 보복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 그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도 2심 역시 삼성의 일부 승마지원금을 '뇌물'이라고 판정했다. '거절하기 힘들었다 해도 공무원 부패에 조력(助力)해선 안 된다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며 뇌물죄 유죄를 선고했다. 말은 맞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현 정권에서도 기업들은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인은 대통령 요구를 거절해도 감옥 가고 거절하지 않아도 감옥에 가야 하나.

작년 1월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던 판사는 '삼성 장학생'이라는 매도와 문자 폭탄 피해를 입었다. 누구라도 이런 사회 분위기에 위축되기 마련이다. 이미 사법부 지도부도 정권과 코드를 맞추는 사람들로 교체됐다. 이 상황에서 재판부가 순전히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법원에는 아직 법과 양식(良識)을 우선하는 꼿꼿한 판사들이 있었다. 2심 판사들도 온갖 공격을 당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 사회를 받치는 기둥이 아직은 건재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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