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도 연극… 演技하지 않는 연기 보여드리죠

조선일보
  • 이태훈 기자
    입력 2018.02.01 03:02

    7일 막 올리는 연극 '3월의 눈' 연출가 손진책·배우 손숙
    초연 뒤 별세한 백성희·장민호 "두 분께 헌정하는 무대"

    "늙은 배우들 연습을 악착같이 하루에 두 번 시켜. 아주 징그러 죽겠어, 호호!"

    배우 손숙(74)의 웃음이 소녀처럼 맑았다. 곁에서 연출가 손진책(71)이 웃었다.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빨간 가건물 극장 처마 밑 흰 눈은 아직 녹지 않았고, 그 앞에 선 두 사람은 겨울에도 푸른 나무 같았다.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배우와 연출가는 2월 7일부터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연극 '3월의 눈'으로 다시 만났다. 곧 뜯겨나갈 처지이나 아직 고고한 한옥집, 피란 월남한 이북 출신 부부 이야기를 담는다. 남편 장오 역에 오현경·오영수, 아내 이순 역에 손숙·정영숙. 이름만으로도 신뢰하게 되는 배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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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숙은 연극 ‘3월의 눈’을 “힘닿는 데까지 놓지 않고 계속 서고 싶은 무대”라 했고 연출가 손진책은 “모든 잃어버린 것에 대한 헌사와 같은 연극”이라 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3월의 눈'은 별세한 원로 배우 백성희·장민호가 주역을 맡은 2011년 초연부터 매진 행렬이 이어졌던 작품. 이번 무대는 별세한 두 배우에게 헌정하는 연극이다. 1월 11일 예매가 열리자 표가 1000장 넘게 팔렸고, 이미 3월 11일까지 진행되는 공연 전체 표 중 절반 넘게 예매됐다. 손진책은 "살아서 전설이셨던 두 배우가 가신 뒤엔 연극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것 같다. 훌륭한 유산을 남기셨으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배삼식 작가가 전해준 첫 원고를 읽던 날을 잊지 못해요. 창 밖에 눈이 내리는데, 오래 연극을 했지만 희곡을 읽고 눈물 나기는 드물었거든." 배우 장민호는 이 연극 초연 다음 해인 2012년 별세했다. 손숙이 "행간(行間)의 서정이 살아 있는 시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초연을 본 뒤 내가 손 선생을 찾아가 백성희 선생 뒤엔 내가 하고 싶다고 했어요. 이런 아름다운 연극은 계속 이어가야 하니까." 손진책은 초연부터 연출을 맡고 있고, 손숙도 2015년에 이어 두 번째 이 연극 무대에 선다.

    2011년 ‘3월의 눈’ 초연 배우 백성희와 장민호.
    2011년 ‘3월의 눈’ 초연 배우 백성희와 장민호. /국립극단

    전날 국립극단 스튜디오 리허설에서 오현경(84)과 손숙의 무대를 미리 봤다. 세파를 버티며 가족을 지킨 남편, 세상을 바꾸겠다더니 돌아오지 않는 아들, 가난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손자 세대….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 현대사 굴곡을 간결히 담는다. 섬세한 대사, 장지문을 만지는 손의 미세한 떨림, 아내가 뜬 털실 외투에 팔을 넣는 느릿한 움직임 같은 디테일을 볼 때 가슴에 전류가 흐른다. 손진책은 "침묵이 극(劇)이 되게 하고 싶었다. 연기하지 않는 연기, 연출하지 않는 연출을 하겠다 마음먹었다"고 했다. "평생 연극을 한 배우들의 경륜과 삶의 총화가 녹아나오는 무대예요. 저는 그 연륜에 기대어 그걸 모셔내오는 것뿐이지요."

    정통 연극은 이 무대 위 뜯겨 가는 한옥처럼 조금씩 야위어가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3월의 눈'은 허물어져 가는 것들을 통해 여전히 건재한 연극의 힘을 증명하는 기분 좋은 역설이다. 손진책은 "사라짐이 단순히 슬픔만은 아닐 것"이라 했다. "한옥은 해체되지만 그 미끈한 마룻장이 밥상도 찻상도 되잖아요. 반면 3월의 눈은 찬연하지만 땅에 닿는 순간 사라지죠. 그런 게 인생이라는 거지."

    "가장 중요한 건 연극의 격(格)"이라고 손진책이 말했다. "격이 돼야 감동을 줄 수 있지요. 좋은 예술은 해독제와 같아요. 모든 걸 경제적 수치로 재단하는 사회에서 연극은 드물게 인간의 내면을 사유하고 그걸 구체화하는 예술이죠. 거기에 연극의 효용과 가치가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관객들이 기다려온 해독과 위로가 두 예술가의 미소 속에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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