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기, 엄정하고도 자유로웠던 82년 ‘현위의 인생' 막 내리다

    입력 : 2018.01.31 11:26 | 수정 : 2018.02.01 14:12


    미궁에서 광화문까지... 가야금 타던 세계인 황병기, 31일 새벽 영면
    “죽으면 잊혀지고 싶어" “연주는 감정을 배제해야" “새로움 없으면 전통은 골동품 돼"
    생전에 백남준, 장한나 등과 지역과 나이를 초월해 교류

    한국에 살며 우주의 소리를 꿈꾸던 세계인, 황병기 선생이 31일 오전 82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그는 36세이던 196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가야금곡 ‘숲'을 발표했다.
    2006년 백남준 선생이 별세했을 때, 황병기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고인과의 추억담을 들었다. “삼십 대 때 뉴욕에서 만났는데 나더러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곡을 연주해보라더군. 가야금 산조를 20분간 들려줬더니, “황 선생! 그보다 더 지루한 음악은 없소?” 그러더구먼. 넝마주이처럼 고물을 싸 들고 다니던 양반이었어. 음악적으로도 시대를 앞서갔던, 그런 천재가 없었지.” 1968년 뉴욕 타운홀에서 백남준·샬럿 무어만과 함께한 ‘재판 기금 모금 퍼포먼스’에서 그들은 함께 공연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 교수가 31일 오전 3시 15분경 별세했다. 향년 82세. 사인은 뇌졸증 치료 도중 발병한 폐렴으로 알려졌다. 오늘 새벽 황병기의 부음을 접하고, 그의 예술 세계를 추억해줄 동시대인의 거인이 누구일까 생각에 잠겼다. 백남준이 뉴욕에 살며 우주를 사유하는 한국인이었다면, 황병기는 한국에 살던 세계인이었다.

    벨기에의 한 음반 가게에서 3가지 다른 유럽 언어로 된 황병기의 가야금 앨범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다. 근사하게 낡은 가야금이 거실 곳곳에 널린 북아현동 언덕 집에서 황병기는 40년 넘게 살았다. 그의 명성은 그가 한국인이라는 본질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음악가로서 황병기 명성의 좌표는 뉴욕이나 파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서울 북아현동 1-316번지에서부터 시작됐고 끝났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활약했던 세계인. 황병기 선생은 ‘한국적’이라는 것을 개가 짖고 새가 나는 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고인의 대표작으로는 신라음악을 되살린 '침향무',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유리그릇에서 영감을 얻은 '비단길' '춘설', '밤의 소리' 등이 있다. SBS 드라마 '여인천하'(2001)에서 사용된 가야금 독주곡 '정난정'을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 대표곡 '미궁'은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드러낸다. 가야금을 첼로 활과 술대(거문고 연주막대) 등으로 두드리듯 연주하며 사람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를 표현하는가 하면 절규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삽입되기도 했다. 1975년 명동극장에서의 초연 당시 한 여성 관객이 무섭다며 소리 지르고 공연장 밖으로 뛰어나갔고, 한동안 금지곡이 되었다가, 호러 어드벤처 게임인 '화이트데이'에 삽입되어 대중에게 알려졌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가야금을 탄 황병기. 한평생 엄정하고도 자유로운 음색으로 ‘현위의 인생'을 살았다./사진=이진한 기자
    철가루로 그린 산수화처럼, 황병기 선생의 ‘미궁’은 가야금으로 전통적인 산조가 아닌 현대적인 아노미 음악을 표현했기에 시대를 초월하는 명곡이 됐다.

    1936년 서울의 북촌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중학교 3학년 때인 1951년부터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해 고등학교 시절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명인 김영윤, 김윤덕, 심상건을 사사했다. 대학 2학년 때 KBS 주최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해 음악계 주목을 받았다. 1974년부터 이화여대 음악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활동했으며, 1986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2002년 은관문화훈장, 2003년 제10회 방일영국악상 대상을 받았다.

    황병기 선생은 법대에 다니면서 법학적 사고방식과 사물을 깊이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사법고시를 치르는 대신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 가야금 강사로 전향했다. 여기에는 현제명 당시 서울대 음대 초대 학장의 강사직 제안이 큰 역할을 했다.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다. “법 하는 사람은 길에 나가면 삼태기로 담아 낼 정도로 많으니, 네가 가야금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보배로운 일이다. 그러니까 너는 가야금을 해라..."

    법학은 그가 음악가로 성장할 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생전에 선생과 깊이 교류하던 첼리스트 장한나(고인은 장한나를 46년 연하의 음악 친구라고 즐겨 표현했다)도, 고인의 영향을 받아 하버드대학 철학과에 진학했다.

    생전에 고인은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로서 의미있는 화두를 많이 던졌다.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굳어진 옛것만 즐긴다면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 골동품이지요.”
    연주할 때는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코미디언이 자긴 웃으면 안 돼요. 자기는 웃는 감정을 빼고 해야 남이 웃어요. 그것처럼 연주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감정에 휘말리면 코미디언처럼 못하게 돼 있어요.” 실제로 유머 감각이 탁월했던 고인은 무표정하고 건조한 음색으로 강단에서 학생들을 배꼽 빠지게 만들곤 했다.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에는 늘 “기억이 안 됐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나는 이제 죽겠죠. 그러면 그걸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유언에 제 무덤이나 비석이나 이런 걸 일절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고인은 마지막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다. 지난해 9월 81세에 새 작품을 발표했다. 2001년 서정주의 시 ‘추천사’로 가곡을 발표한 후 16년 만이었다. 미당 서정주의 시 ‘광화문’(1959)에 곡을 붙인 동명의 음악이다. ‘북악과 삼각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큰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어느 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에 황병기는 남성 독창자, 가야금, 장구 편성의 음악을 입혔다.

    앞을 보지만 더 멀리 다른 걸 바라보는 듯한 검은 눈동자, 황병기의 가야금 소리는 그렇게 구름 속의 뼈를 발라 내듯, 때론 천상의 완벽한 소리를 향해 하늘로 비행했고, 때론 인간의 불완전한 소리를 안고 땅으로 투항하듯 내려 앉았다. 신이 그의 가슴뼈에 12줄의 가닥을 숨겨 둔듯싶었다.

    1962년 27세에 다섯 살 연상인 소설가 한말숙과 결혼해 55년을 해로했다. 서울대 언어학과에 다니던 한말숙이 국립국악원에서 고인과 함께 가야금을 배우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한말숙은 당시에 소설가로 이미 이름을 날릴 때였다. 그들은 살면서 서로의 예술 세계와 인격을 극도로 존중했다. 서정주와 그의 아내가 그랬듯, 고인도 어느 자리에서나 아내의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3년 전, 두 사람은 나란히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슬하에 준묵·원묵 씨, 딸 혜경·수경 씨를 두었다. 고인의 장례식장은 서울아산병원 30호에 마련됐다. 장지는 용인천주교 묘원이며 발인은 오는 2월 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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