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우리 국민이 왜 북한 정권에서 '구원의 손길' 받아야 하나

    입력 : 2018.01.26 03:17

    "남북 대화도 좋고 평화도 좋지만 더 이상 북한에 비굴한 자세보이지 말기를
    국민 자존심 지켜주길"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바람 앞의 촛불 지키듯 남북 대화를 지켜달라"고 했지만, 정말 지켜줘야 할 것은 우리 국민의 자존심이다. 요즘 우리 정부가 뭔가에 씌어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는 바로 그거다.

    남북 대화도 좋고 평화도 좋지만 더 이상 북한에 비굴한 자세를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북한이 예술단 사전 점검단을 파견하겠다는 날에 돌연 취소해도 말 한마디 못 한 게 우리 정부였다. 북한에는 못 하고 총구(銃口)를 "과도한 추측성 보도나 비판적 보도에 북측이 때때로 불편한 반응을 강하게 보여왔다"며 우리 언론에 돌렸다. 바로 직전 북한 매체에서 문 대통령을 향해 '얼빠진 궤변' '가시 돋친 음흉한 악설 일색'이라며 퍼부어댈 때는 엎드려 있었다.

    청와대에서 북한 눈치를 보면 현장 실무자는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 강릉의 황영조체육관에서 현송월에게 "미리 연락 주셨으면 여기에 5만석 규모로 만들 수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 주시는 바람에…"라고 굽실거리며 비위를 맞추는 대한민국 공무원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룻밤 65만원이라는 VIP룸, 한 끼당 십 몇 만원짜리 호텔 식사, 고급 와인으로 멈추지 않고, 강릉에서 서울로 올 때는 현송월 일행만을 위해 KTX 특별 열차를 통째로 내줬다. 문재인 정부는 '재벌(財閥) 정부'인 모양이다. 심지어 그날 수행하던 국정원 직원은 눈발이 날리자 현송월 일행에게 대형 우산을 받쳐줬다. 독재자 김정은이 내려보낸 젊은 여성이 이런 국빈 대접을 받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 젊은이나 무엇보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던 탈북민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북한 예술단 사전점검단을 이끌고 방남한 현송월 심지연관현악단장이 22일 오후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정부 당국이 언론에 제공한 현송월 관련 영상에는 목소리가 없다. 북측 요구에 따라 편집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로서는 다행이다. 편집되지 않았으면 우리 정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얼마나 알랑방귀를 뀌었는지 전 국민에게 공개됐을 것이다. 이렇게 국민 세금으로 퍼주고 특급 상전(上典) 모시듯 했지만 돌아오는 북한 반응은 이렇다.

    "역대 최악의 인기 없는 경기 대회로 기록될 수 있는 이번 겨울철 올림픽 경기 대회에 우리가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고 있는 데 대해 고마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 왜 지구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북한 독재 정권에서 '구원의 손길'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하나. 왜 정부는 국민에게 긍지는 못 심어줄지언정 모욕감을 들게 만드는가. 더 가관(可觀)은 청와대가 북한 정권과 똑같은 논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참가로 평창올림픽에 대한 전 세계적 관심을 높였다. 불과 두 달 전까지 한반도는 전례 없는 전쟁의 위험 속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북한의 참가로 평화롭게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됐다." 현 정권은 '평창 참가라는 북한의 선물을 받았다'는 고마움에 신세 갚을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올림픽 개최 전날 북한이 평양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하는 것에 대해 "우연히 날짜가 겹친 것이고 평창올림픽에 재를 뿌리려는 것은 아니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말했다고 한다.

    이런 광경은 어디서 본 것 같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앞에서 말했다. "나는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과 싸워왔고 국제무대에서 북측 입장을 변호해왔다. 나는 북측 대변인 또는 변호인 노릇을 했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던 일도 있다." 북측 대변인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대변인 노릇이나 잘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북한과 대화를 어떻게 해보려고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국익을 해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처음 동계올림픽 유치 신청을 했을 때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은 "유치 신청 리스트가 올라왔을 때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 '평양올림픽'을 신청한 줄 알고…"라며 훗날 털어놓았다고 한다. 정말 그런 착각이 현실로 돼가고 있다.

    평창올림픽에 '구원의 손길'을 줬다는 북한은 개최 전날 평양에서 대규모 열병식을 한다. 세계의 시선을 평양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그날 강릉에서는 북한 예술단의 축하 공연이 열린다. 북한 창군 기념 공연인지 평창올림픽 전야제 공연인지 헷갈릴 판이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올림픽 기간에는 '북한 미녀 공연단'과 '미녀 응원단'이 우리 국민을 현혹할 것이다.

    김정은 정권의 악마성(惡魔性)은 잊힐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본질인 '핵무기 위협'은 뒷전으로 밀릴 것이다. 대신 '같은 민족끼리'라는 우호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북한은 해묵은 '카드'를 내밀 것이다.

    평창 유치에 핵심 역할을 했던 한 인사가 내게 타령조로 말했다. "멍석 깔아 놓으니 북한 아이들이 와서 휘저을 판이네. 죽 쒀서 개 주네. 이러려고 3수(修)해가며 올림픽 유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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