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블록버스터로 되살린 톨스토이 고전

조선일보
  • 이태훈 기자
    입력 2018.01.25 03:04

    안나 카레니나

    시작부터 압도적이다. 조명이 켜지면 거대한 기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무용수들이 몸의 곡선을 이어 만들어낸 형상. 기차는 애증과 욕망이 뒤엉키는 장소이자 한 번 출발하면 종착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치다. 강렬한 록 비트 군무와 합창 속에 거대한 바퀴와 피스톤이 천장에서 내려오며 공연이 시작된다.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연출 알리나 체비크)는 블록버스터의 여러 조건을 갖췄다. 안나 역에 옥주현·정선아, 연인 브론스키 역에 이지훈·민우혁을 투입한 캐스팅이다. 오페라극장 무대 깊이를 영리하게 활용한 조명의 입체감, 움직이는 LED화면으로 화려한 무도회장과 풍요로운 시골을 오가는 무대 연출도 눈을 사로잡는다. 노래 역시 폭발적 고음 넘버의 연속이다.

    뮤지컬‘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 역을 맡은 정선아.
    뮤지컬‘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 역을 맡은 정선아. 선 굵은 서구적 외모와 살짝 내지르는 듯한 음색이 안나 역할에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원작은 1870년대 발표된 레프 톨스토이 소설이다. 그동안 영화, TV 시리즈, 연극, 발레로 다양하게 변주됐지만 호평은 많지 않았다. 원작의 정서적 깊이가 책갈피를 빠져나오면 이상하게 빛이 바래졌기 때문이다.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역시 다양한 인간 군상의 세밀한 감정 표현은 생략한다. 대신 주인공 안나와 브론스키의 비극적 사랑에 집중한다. 1·2막 합쳐 3시간 남짓한 이 무대에서 안나와 브론스키가 빚어내는 역동적 불균형의 서사까지 담아내길 바란다면 기대가 지나칠 것이다. 캐릭터에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아름다운 노래들이다. 시적인 가사와 검증된 배우들의 열창이 서사적 개연성의 공백을 너끈히 메운다. 기차역 눈보라 속에서 안나와 브론스키가 '당신이 내 곁에 없다면 세상 모든 것은 사라져 의미를 잃는다'고 노래하면 그 갑작스럽고 뜨거운 사랑에 동의하게 된다. 안나의 오빠 스티바가 '철학 따윈 집어치우고 쉽게 쉽게 살자'고 노래하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무엇보다 옥주현·정선아 두 안나가 빛나는 대목은, 버리고 떠났던 전 남편 집으로 찾아가 두고 온 아들을 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장면이다. 반주 없이 곱고 맑은 목소리의 힘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아픔과 아들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당대의 전설적 소프라노 아델리나 패티의 오페라 아리아를 재연하는 노래는 그야말로 압도적. 한번 들어보면 커튼콜 때 가장 뜨거운 박수를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공연은 2월 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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