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두 얼굴

입력 2018.01.22 08:40

프란치스코 교황은 18일(현지시각) 후안 바로스 주교를 둘러싼 성추문 은폐 의혹에 대해 “모두 중상모략”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바로스 주교는 수십 명의 아동을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나 2011년 파면된 페르난도 카라디마 신부의 30년 제자로, 현재 그의 성추행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칠레에서는 교황이 2015년 바로스 주교를 카라디마 전 신부의 교구였던 칠레 오소르노 남부 교구에 임명한 것을 계기로 가톨릭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높은 상황이다.

교황은 이날 칠레 이키케에서 대중 미사를 집전하기 전, 의혹에 대한 입장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바로스 주교에 불리한 증거가 나오는 날 입을 열겠다”며 “그에 불리한 증거는 털끝만큼도 없다. 모두 중상모략이다”고 답했다. 교황은 끝으로 기자들에게 “알아들었느냐”고 되물으며 다소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는 교황이 불과 이틀 전인 16일 현지 일부 사제들의 성추문에 대해 “고통과 수치심을 느낀다”며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피해자들과 기도하며 운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교황은 지난해 1월에도 전 세계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사제들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한 아동들의 고통과 교회 구성원 일부의 죄악을 인정한다”며 “이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죄악”이라고 개탄한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5일(현지시각) 칠레 산티아고 교황청 대사관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웃고 있다. / 블룸버그 제공
바티칸은 그동안 끊이지 않는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문으로 몸살을 앓아 왔다. 2013년 3월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무관용의 원칙’을 천명하며 개혁을 선언했다. 그러나 5년이 흐른 지금도 피해자 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일각에서는 아동 성추행 근절을 위한 교단의 의지가 충분치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교황의 이날 발언은 그런 가운데 나왔다.

◆ 수포로 돌아간 칠레 민심 달래기…교황, 과거 반대하는 시위대에 ‘어리석다’ 비난도

카라디마 사건은 2010년 언론 보도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교단이 2002년부터 이어진 피해자들의 고발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티아고의 명예대주교는 이후 희생자들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렇게 사건은 카라디마 신부의 파면과 함께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2015년 교황청이 바로스 주교를 오소르노 교구에 임명하면서 카라디마 사건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칠레에서 가톨릭의 신용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교구의 분열이 이어졌다. 수백명에 달하는 신자와 시민들은 바로스 주교의 취임식에서 “바로스, 오소르노를 떠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뉴욕타임스 등은 연일 관련 보도를 쏟아냈다. 여기에 당시 교황이 오소르노 시위 관련, “어리석다”고 말한 영상까지 유포되며 반발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바로스 주교는 취임 후 제대로 된 교회 운영을 할 수 없었다. 대부분 오소르노 교구 소속 신자와 사제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교황은 칠레 방문을 결심하고 화난 민심을 달래고자 했다. 하지만 칠레의 반응은 싸늘했다. 교황의 ‘중상모략’ 발언이 결정적이었다.

교황이 사제 성추문 파문을 겪고 있는 칠레를 방문하고 있는 가운데 16일 수도 산티아고에서 교황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이 경찰에 체포되고 있다. 이날 교황의 미사가 열리는 공원으로 행진하려는 200여명의 항의 시위대는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 AP연합뉴스 제공
여론은 삽시간에 분노로 들끓었다. 카라디마 사건의 피해자인 후안 칼로스 크루즈는 이날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교황은) 마치 카라디마가 나를 학대하고 후안 바로스가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동안 내가 셀카라도 찍을 수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며 “교단은 단단히 미쳤다. 교황은 피해자들에게 속죄한다고 말하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용서를 구하는 그의 호소는 공허하다”고 비난했다.

오소르노 교구 소속 신자와 사제들로 구성된 반(反) 바로스 단체는 교황이 왜 지금에 와서야 피해자들의 주장을 ‘중상모략’ 취급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교황청이 2014년 바로스를 전출시키기로 결정했을 당시 그의 혐의를 인정한 게 아니었냐는 설명이다.

세계 각국의 가톨릭 성직자 성범죄 사례를 수집 중인 단체 ‘비숍어카운터빌리티 닷 오르그’의 앤 배럿 도일 이사는 이날 성명을 통해 “교황이 사건을 원위치로 되돌렸다”며 “앞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교단이 그들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에 숨어 지내기로 결정할지 누가 알겠느냐”고 한탄했다.

◆ “교황, 말과 행동 다르다”…갈 길 먼 바티칸 개혁

교황의 양면적인 태도에 대한 논란은 꾸준히 있어 왔다. 지난달에는 선종한 버나드 로 추기경의 장례 미사를 주관하고 축도를 해 논란이 일었다. 로 전 추기경은 자신의 교구에서 잇따라 발생한 사제들의 아동 성추문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혐의를 인정하고 2002년 보스턴 대교구장에서 물러났다. 보스턴 대교구의 성추문은 현지 언론 보스턴글로브의 취재와 보도로 밝혀졌으며, 이를 기폭제로 미국 내 다른 지역은 물론 아일랜드, 독일, 호주 등 전 세계에서 비슷한 성추문과 조직적인 은폐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사에 앞서 조문 전보를 통해 “로 전 추기경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며 애도를 표현했다. 그러나 특별히 로 추기경이 연루된 아동 성추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미사는 현직 추기경과 동급으로 진행됐다.

교황이 지난달 21일 바티칸 사도궁에서 교황청의 최고 행정조직인 쿠리아의 추기경과 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성탄절 연설을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제공
이와 관련 보스턴 대교구 성추문의 피해자인 앤 헤이건 웹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교황은) 말로는 피해자들을 보살피고 염려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그는 언제나 거창한 연설을 하며 모두가 그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지만, 성추문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내건 약속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례 미사가 치러진 장소도 문제가 됐다. 로 전 추기경의 장례 미사는 바티칸 대성전으로 불리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제임스 마틴 예수회 신부는 “모든 가톨릭 신자는 장례 미사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모두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미사를 갖지는 못한다”며 “(교황의 결정은) 아동 학대에 있어 주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교회의 사명을 망가뜨리는, 충격적일 정도로 둔감한 처사였다”고 비난했다.

교황이 2014년 사제들이 저지르는 아동 성범죄를 “사탄 숭배 만큼 끔찍한 신성 모독”이라 일컬으며 설립한 미성년자보호위원회 역시 지난달 임기가 만료된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미성년자보호위원회의 새 구성원과 임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렉 버크 교황청 공보실 대변인은 가톨릭 전문매체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미성년자보호위원회 구성과 관련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교황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에머 매카시 미성년자보호위원회 언론 담당관 또한 “소식이 들어오는대로 언론과 대중에게 알릴 것”이라고만 답했다.

그나마 있는 미성년자보호위원회의 활동마저 제한적이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디언 등은 2016년 몇몇 교황청 고위 관료들의 저항 탓에 진척이 더디다고 보도했고, 당시 성추행 피해자로 미성년자보호위원회에 참여했던 피터 사운더스는 “(미성년자보호위원회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며 사임했다. 지난해 6월에는 교황의 측근이자 ‘바티칸 서열 3위’인 조지 펠 호주 추기경조차 1970년대 호주에서 벌어진 아동 성추행 사건을 은폐한 혐의로 기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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