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통계 의존했던 한국 연구… 20년 걸려 독립"

조선일보
  •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2018.01.22 03:04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장기 통계' 낸 김낙년 교수
    6·25 무렵 기대수명 50세 안 돼… IMF 후 파산 年 100건→10만건

    "광복 70년이 넘도록 일본 학계에 의존하던 한국 주요 통계를 드디어 우리 손으로 정리했습니다. 삼성이 소니를 모방하다 독자 제품을 만든 것처럼 학문적으로 그들을 추격해서 독립을 이룬 것입니다."

    19일 동국대에서 만난 김낙년 교수는“제대로 된 통계가 있어야 국제학계에서 시민권을 갖고 한국의 발전 스토리에 대한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19일 동국대에서 만난 김낙년 교수는“제대로 된 통계가 있어야 국제학계에서 시민권을 갖고 한국의 발전 스토리에 대한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상훈 기자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경제·사회 통계를 집대성한 '한국의 장기 통계'(전 2권·도서출판 해남)를 펴낸 낙성대경제연구소 김낙년(동국대 교수) 소장은 20년에 걸친 역사 통계 작성 대장정을 마무리해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김 소장과 박기주(성신여대)·박이택(고려대)·차명수(영남대) 교수 등 경제사학자 22명이 참여한 이 책에는 자연환경과 인구부터 산업과 무역, 소득과 물가, 교육과 건강, 기업과 사법 등 22분야 1만여 항목의 연도별 통계, 각 분야 흐름과 특징에 대한 해설이 들어 있다. 항목마다 고유 번호가 붙은 통계표를 이용하면 각 분야가 어떻게 변화돼 왔고, 외국과는 어떻게 다르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수량적 연구가 가능하다.

    강우량·지대·임금을 비교 검토하면 19세기 초·중반엔 많았던 강우량이 19세기 말 감소했고 토지 생산성과 실질 임금이 크게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기대 수명은 6·25전쟁 무렵 50세가 안 됐고 미국에 크게 뒤졌지만 격차를 점점 좁혀서 2005년 미국을 추월했다. 물가가 가장 폭등한 시기는 1940년대 중엽~1950년대 후반이었고, 그다음은 1960~1970년대였다. 화폐 발행액은 일제 말부터 6·25전쟁까지 격변기에 증가율과 변동 폭이 매우 컸다. 근대 사법 제도가 도입된 후 오랫동안 민사와 형사 사건 수는 별 차이가 없었는데 1980년 무렵부터 민사가 형사를 압도하기 시작했고, 소송 가액도 계속 증가했다. 1년에 100건이 안 되던 파산 사건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급증해 연 10만건에 이른다.

    그동안 한국 경제사 연구자들은 1988년 일본 히토쓰바시대 경제연구소가 펴낸 '구(舊)일본 식민지 경제 통계'를 이용했다. 일본 경제사학자들이 20년 걸려 만든 이 책은 1911~1938년 식민지 조선의 국내총생산(GDP) 등을 정리한 것으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매디슨 추계의 한국 관련 통계도 이것을 사용한다. 도쿄대 대학원생 시절 이 통계를 처음 접한 김 교수는 "논문을 쓰려면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하루빨리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1996년부터 한국 장기 통계 작성에 들어갔다. 개별 연구 성과를 모아 2001년 '한국 경제 성장사: 예비적 고찰'이 간행됐고, 이어 학술진흥재단과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은 공동 연구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2004년),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년'(2006년), '한국의 장기 통계: 국민 계정 1911~2010'(2012년)이 차례로 간행됐다. 이 과정에서 히토쓰바시대 통계 작성을 주도한 미조구치 도시유키(溝口敏行) 교수 등과 학술 교류도 활발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의 지원을 받은 '한국의 장기 통계'는 이전 작업이 국민소득과 산업 통계에 집중했던 것을 경제·사회 전반으로 확대했다. 또 모델을 일본 통계에서 구미 학계의 표준인 미국 역사 통계(HSUS)로 바꾸었다. 세계 학계가 우리 통계를 이용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영문판도 곧 발간한다. 김낙년 교수는 "'한국의 장기 통계'는 그동안 소수 전문가만 이용하던 통계의 진입 장벽을 크게 낮춰서 우리 학계의 병폐인 분과 학문 간 칸막이를 허물고 국내외 연구자들의 활발한 토론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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