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실 눈칫밥 먹던 윤성빈… 이젠 세계가 그의 눈치본다

입력 2018.01.15 03:05 | 수정 2018.01.15 07:59

[평창 D-25] '썰매 챔피언' 되며 확 달라진 대접

출전 초기 대기실서 파스 바르면 외국 선수들 "냄새나" 구박하다
尹이 지나가면 서로 먼저 말걸어… 늘 반겨주던 두쿠르스, 시선 피해

지난 12일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2017~2018시즌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IBSF) 월드컵 7차 대회. 현장에서 지켜본 윤성빈(24)은 마치 영화제에 참석한 톱스타 같았다.

세계 랭킹 1위인 그가 지나갈 때마다 외국 선수들이 먼저 다가와 말을 붙였고, 관중은 그를 향해 가장 큰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대회 시작 전 윤성빈은 선수 대기실 한가운데 침대에 누워 마사지와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미국과 영국 선수들은 먼발치에서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두쿠르스 형, 예전처럼 대해줘” - 윤성빈(왼쪽)이 12일 스켈레톤 월드컵 7차 대회에서 우승한 뒤 피니시 라인에 선 모습. 옆의 마르틴스 두쿠르스(3위)는 외면하듯 딴 쪽을 보고 있다.
“두쿠르스 형, 예전처럼 대해줘” - 윤성빈(왼쪽)이 12일 스켈레톤 월드컵 7차 대회에서 우승한 뒤 피니시 라인에 선 모습. 옆의 마르틴스 두쿠르스(3위)는 외면하듯 딴 쪽을 보고 있다. /김승재 기자
평창 올림픽을 한 달 앞두고 열린 이날 경기에서 윤성빈은 1·2차 시기 합계 2분 14초 77로 생모리츠 트랙 기록을 세우며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은메달은 독일의 악셀 융크(2분 15초 64), 동메달은 윤성빈의 최대 경쟁자 마르틴스 두쿠르스(라트비아·2분 15초 87)가 각각 차지했다. 윤성빈은 1~7차 월드컵에서 금 5, 은 2개를 목에 걸며 가장 유력한 평창 챔피언으로 부상했다. 경기 직후 본지와 만난 두쿠르스(34)는 "윤성빈이 평창 트랙에서 미리 훈련하며 더 강해질 걸 생각하면 두렵다"고 했다. 두쿠르스는 지난 시즌까지 8년간 세계 1위를 지켰다.

◇톱스타가 된 미운 오리 새끼

저도 성화 봉송하고 싶어요 윤성빈이 12일 월드컵 7차 대회 우승 직후 평창올림픽 성화봉 모양의 볼펜을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
저도 성화 봉송하고 싶어요 - 윤성빈이 12일 월드컵 7차 대회 우승 직후 평창올림픽 성화봉 모양의 볼펜을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 /김승재 기자
2016년 2월 윤성빈이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월드컵 금메달을 땄을 때 시상식이 30분가량 지연됐다. 한국 선수의 우승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주최 측이 애국가를 준비하지 않은 탓이었다.

부랴부랴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음악을 틀었지만 어느 부분에서 끊어야 할지 몰라 애국가는 4절까지 울려 퍼졌고, 선수와 관중은 꼼짝없이 계속 일어서서 태극기를 바라봤다.

그동안 스켈레톤은 철저하게 북미·유럽만의 리그였다. 백인 선수끼리 메달을 나눠 갖던 종목에 나타난 동양인 경쟁자는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다. 윤성빈이 선수 대기실에서 파스를 바르면 다른 선수가 "냄새 나니 밖에 나가서 하라"고 면박을 줄 정도였다. 윤성빈의 인사를 무시하는 선수도 있었다.

그나마 윤성빈을 반갑게 맞아준 선수가 두쿠르스였다고 한다. 그랬던 두쿠르스는 1위 자리를 내준 뒤에는 윤성빈을 견제하는 행동이 잦아졌다. 윤성빈은 "두쿠르스 말고도 잘하는 선수는 많다. 굳이 한 명만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를 의식한다고 내 레이스가 잘 풀리는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생모리츠에서 목격한 '평창의 기적'

생모리츠에서 목격한 건 윤성빈의 우승만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시설, 장비, 선수도 없었던 한국이 백년 전통의 서구 강국을 단 몇 년 만에 넘어선 현장의 진풍경이었다. 2011년 평창 유치가 확정된 뒤 본격적인 지원과 투자를 받은 스켈레톤 대표팀은 체육대학 진학을 희망했던 평범한 고교 3학년 학생 윤성빈을 데려와 키웠고, 실력 있는 외국인 코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해 외국 기술을 수혈받아 압축 성장했다. 한강의 기적을 본떠 '평창의 기적'이라 부를 만했다. 2015년 대표팀에 합류한 리처드 브롬리(42·영국) 장비 담당 코치는 "처음 여기 왔을 때만 해도 한국이 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다"며 "2012년 스켈레톤에 입문한 윤성빈이 20년 넘게 썰매를 탄 최강자 두쿠르스를 넘어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사건"이라고 했다.

7차 월드컵을 마치고 14일 귀국한 한국 대표팀은 곧장 평창으로 향했다. 19일 열리는 8차 월드컵(독일 쾨닉스)을 포기하고 평창 올림픽 슬라이딩센터에서 반복 훈련을 하며 홈 트랙 이점을 최대한 살리겠다는 계획이다. 윤성빈은 "월드컵은 올림픽을 앞두고 치른 모의고사일 뿐"이라며 "전 세계가 지켜볼 평창에서 한국 썰매의 달라진 위상을 제대로 보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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