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부부의 삶… 정치인들은 보시라, 꼭

    입력 : 2018.01.15 03:03

    [연극 리뷰] 경남 창녕군 길곡면

    "내는 내한테만 있는 특별한 거를 좀 갖고 싶어. 아빠가 중요한 게 아이고, 어떤 아빤가 이기 중요한 거니까." 비정규직 월급쟁이인 채로 아빠가 되고 싶진 않다는 남편의 말을 아내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받는다. "자기는 남들이 절대 못 가진 '내'를 갖고 있지." 객석에 폭소가 터진다. 그 말이 슬프면서 웃기는데, 이 연극 정서가 내내 그렇다.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경남 창녕군 길곡면'(연출 류주연)은 마트 배달원과 판매원으로 일하는 부부 이야기다. 집세와 대출 이자, 이런저런 할부금 내면 살림이 빠듯하다. 외식은 밸런타인데이 하루뿐이지만, 부부는 TV에 나온 하와이 해변을 꿈꾸며 알콩달콩 행복하다.

    남편과 아내는 잡지 광고를 보며 월셋집 비좁은 욕실에 월풀 욕조 놓는 상상을 한다. 아내가 말한다. “상상만 하는데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몰라.”
    남편과 아내는 잡지 광고를 보며 월셋집 비좁은 욕실에 월풀 욕조 놓는 상상을 한다. 아내가 말한다. “상상만 하는데 왜 이렇게 피곤한지 몰라.” /극단 산수유

    아내가 덜컥 임신하면서 일상의 균형이 무너진다. 낳고 싶어 하는 여자와 아직 안 된다며 완강한 남자. 담배·화장품 다 끊고 친정엄마 드리는 용돈 10만원까지 빼도 한 달 남는 생활비는 8만원인데, 그걸로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을까. 둘은 어떤 결론에 다다를까.

    연극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로 웃음과 눈물을 번갈아 안긴다. 그 모습이 평범한 모두의 그것이어서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무대 속으로 빨려든다. 아내는 꽁꽁 언 몸으로 술 취해 들어온 남편을 안아주며 말한다. "안 굶어 죽는다. 자자, 여 들어온나. 몸이 우예 이리 꽁꽁 얼었노."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함께 있을 때 이들의 작은 침대는 어느 왕후장상의 침실보다도 따뜻하다.

    이 젊은 부부의 현실을 가리켜 황폐하고 비루하다 말하는 것은 모욕이다. 연극은 안 그래도 고단한 현실을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부는 자주 좌절하되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질 거라 믿으며 한 발 더 내디딘다.

    극단 산수유 대표 류주연 연출가가 독일 희곡을 직접 번안했다. 원작의 상황과 대사를 잘 살리면서 비정규직·저출산 등 지금 이 땅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녹여 넣었다는 평. 세대를 넘어 보편적 감동을 끌어내는 힘을 갖춰, 관객 연령층이 다양하다.

    무엇보다 이 연극을 봐야 할 사람은 입만 열면 청년 걱정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이다. 청년은 1987년에도 있었고 경남 창녕군 길곡면에도 있다. 공연은 오는 21일까지 딱 1주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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