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72세 농담가 윤여정, 그 상쾌한 '어른의 맛'..."노력만이 나의 힘"

    입력 : 2018.01.13 06:00 | 수정 : 2018.01.13 09:04

    “72세는 나도 처음, 반성하고 사과해도 또 실수하더라"
    “난, 창의성 없고 노예근성 있어… 죽을 때까지 ‘떨림과 최선’ 유지하고파"
    ‘윤식당2’ 높은 시청률… “스태프들 중압감에 편집으로 밤샐까 걱정"
    ‘화녀'로 받은 여우주연상 트로피는 엄마가 내다버려

    72세에 전성기를 맞고 있는 윤여정. 주어진 순간에 사력을 다하는 게 그의 스타일이다. 최근 새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이병헌, 박정민과 함께 열연했다.
    땀구멍으로 소금물이 차오르는 한여름, 윤여정이 청담동 915번지 스튜디오에 거대한 세이블 코트를 입고 나타났던 모습이 떠오른다. “밍크 아니에요. 세이블!”이라고 그녀가 예의 그 와인 냄새나는 똑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2008년, 영화 ‘여배우들' 촬영 현장에서 나는 ‘기자’ 역을 맡아 그녀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 영화는 폭설로 도착하지 못한 보석을 기다리다 지친 여배우들이 패션지 ‘보그' 촬영장에 갇혀 하룻밤 동안 각자의 ‘본색'으로 충돌한다는 사랑스러운 ‘페이크 다큐'였다.

    영화 예고편에서 “여성지가 아니라 ‘보그’라니까 ‘보그’!”라는 명료한 대사로 이 거대한 ‘쇼’의 오프닝을 알렸던 윤여정. 영화 속에서 자신이 ‘대타’로 불려온 게 아닌가 추궁하던 그녀에게 내가 했던 대사가 기억난다. “대타 아니에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진한 장미 냄새를 피우는 60대 여성으로, 윤여정 말고 누구를 떠올릴 수 있겠어요?” 그 말은 진심에서 나온 즉석 대사였다.

    이재용, 고현정과 어울려 ‘우리가 밥 먹고 농담하는 것만 찍어도 재미난 쇼가 되겠다'던 그들의 작당은 애초 의도했던 프랑스와 오종의 ‘8인의 여인들'과는 아주 먼 다정하고 솔직한 ‘페이크 다큐’로 완성되었다. 당시 63세였던 그 여성은 지금 72세가 되었고, 예능 다큐 ‘꽃보다 누나' 이후로 그 에너지는 더욱 폭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예쁘고 약한 여배우보다 ‘갈등’과 ‘독설’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여배우들의 퍼즐 속에서도 윤여정은 오롯했다. ‘일급 마이너’라는 별명답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정확히 이름으로 호명했으며(가령, “김지수 씨 연기 좋았어!” 하지만 전 남편인 조영남의 경우는 이름 대신 C모 가수라는 이니셜로 부른다), 흡연 코너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스태프들에게 “고맙지만 괜찮아요”라고 응대하고, 케이크를 들고 응원 온 방송국 후배들에게 ‘출연료를 떼이지 않는 법’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72년 동안 한 번도 따분해 본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여자. 자기 안에 깃들인 고상함이나 추잡함에 대해서 언제든 거칠 것 없이 단어를 튕겨 올릴 수 있는, 타자기 같은 혀를 가진 여자 윤여정. 대타로 와서 전전긍긍한다는 ‘여배우들'의 설정과 달리, 2018년의 윤여정은 그렇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2008년 영화 ‘여배우들'에 출연했을 당시의 윤여정. 당시에도 현장의 모든 스태프를 격식을 갖춘 세련된 매너로 대했다.
    불편 없이 영어를 구사하고, 말끝마다 뼈있는 농담을 난사하는 우리 시대의 ‘뻔뻔하고 성실한' 할머니, 윤여정을 만났다. 새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이병헌과 박정민 사이에서 ‘어색한' 사투리로 모자의 정을 나누던 그는, tvN 시리즈 ‘윤식당2’에서는 이서진과 박서준을 진두지휘하며 물 만난 고기처럼 ‘회장'의 포스를 발산했다.

    눈 밝은 나영석에게 발견된 이 ‘웃기고 세련된 할머니'는 환상의 해변에서 펼쳐지는 서바이벌 게임의 주인공으로, ‘여배우, 노인, 사장’이 등가가 되는 리얼리티쇼의 호스트로 화제의 중심이 됐다. 그렇게 불고기에서 비빔밥으로, 익숙했던 음식이 여행지에서 재발견되듯 한평생 ‘노력과 농담'으로 자신을 요리한 윤여정이라는 ‘어른의 맛'도 점점 깊고 오묘해졌다.

    -유머 감각이 참 탁월하세요.

    “그러게 내가 고춘자인가 봐요. 장소팔 고춘자 알아요? 희대의 만담 꾼이지.”

    -‘여배우들' ‘죽여주는 여자' 같이 했던 이재용 감독과 만담이 압권이지요(웃음). 이재용이야말로 윤여정의 사적 공적 매력을 잘 써먹은 선구자 같은 사람입니다. ‘이분은 연기보다 사생활이 더 매력 있다'라고 신랄한 농담까지 했는데… 결국 그 예언처럼 ‘윤식당'으로 전무후무한 당대의 상쾌한 어른이 되셨어요.

    “아유… 난 내가 그렇게 떴는지 뭐 잘 모르겠어요.”

    -‘윤식당2’의 초반 시청률이 동 시간대 최고 14%대까지 올랐어요. 이 정도일 줄 예상은 했나요?

    “못했어요. 스태프들도 놀랐지. 초반 시청률이 너무 높게 나오면 나는 걱정이 돼. 그러면 애들이 편집하느라 죽어. 8~9% 정도 나오다가 서서히 올라가면 딱 좋은데 말이에요. 나영석이 9시 58분에 문자를 보냈어, ‘부담스러운 성적입니다. 선생님의 살신성인 덕분이에요.’

    그이가 나를 ‘삼시세끼'할 때 강원도 정선까지 게스트로 끌고 가서 고생을 시키더니만. 같이 갔던 최화정이는 ‘이럴 거면 ‘꽃보다 누나’ 할 때도 자기를 부르지!' 불평을 한 바가지 했다고. 그런데… 참, 이렇게까지 될 줄이야.”

    -‘살신성인’을 하셨다잖아요.

    “공항에 휠체어 타고 내릴 뻔했어요. 식당에 정말 손님이 미어터졌어. 스페인 가라치코 라는 곳이 아프리카 모로코보다 더 아래 있는 인구 5천 명 사는 조그만 마을이에요. 중국 식당도 하나 없어 동양 음식이라곤 못 먹어본 분들이 살죠. 그 사람들이 막 몰려오더라고. 그런데 나는 내가 간 곳이 참 좋은 여행지라는 걸 화면 보고 알았어요. 진짜로 출퇴근할 때 담벼락밖에는 못 봤다니까(웃음).”

    -애초에 ‘윤식당'은 슬로우 라이프 콘셉트로 한적한 바닷가에서 손님 없으면 서핑도 가는 ‘카모메 식당’에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아주 멀리 와버렸어요.

    “그게 너무 열심히 한 내 책임이 좀 크죠. 노인네가 미친 듯이 봉두난발을 해가지고 뛰어다니니, 저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을 거야.”

    ‘윤식당2’에서 윤여정은 그 자신 표현대로, 봉두난발인 채로 열심히 음식을 만든다. 1편에서는 불고기로 2편에서는 비빔밥과 잡채로 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셨어요?

    “못하는 거 하니까 열심히 해야지. 손님이 오니까, 나도 주워들은 건 있어서 잘은 못해도 음식은 뜨끈뜨끈할 때 내가면 웬만큼 맛있는 건 알거든. 그러다 보니 칼에 베이고 불에 데고, 온몸이 상처야. 이 상처가 영원히 남아야 내가 나영석이를 계속 갈굴 수 있다고. 이 상처 때문에 내가 미스코리아도 못 나간다고(웃음).”

    -가만히 보면 할리우드의 기품 있는 여배우 헬렌 미렌과 닮으셨어요. 얼마 전 이병헌이 인터뷰에서 헬렌 미렌을 가장 존경한다고 그러더군요.

    “헬렌 미렌은 나하고 생각이 비슷하더라고. 우리 나이에 장르를 가리기보다 기회가 오면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거죠(웃음). 이병헌은, 글쎄 인간적으로는 좀 어려웠어요. 영화에서도 거리가 좀 있는 아들이었고, 그래서 곁을 막 주고 그러진 않더라고. 이병헌이 참 연기를 잘해. 젊을 때 했던 ‘공동경비구역 JSA’도 좋았고, 최근에 ‘남한산성’도 잘 봤어요.”

    -이번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선 이병헌 박정민 두 형제의 출중한 연기에 비해 ‘나는 실패했다'는 표현을 썼어요. 만족스럽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게 얘기했다가 야단맞았어요. 이병헌, 박정민은 참 잘 했어요. 난 뭐, 사투리에 얽매여서 망했어. 부산 사투리가 그렇게 어려운지 알았나? 알았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거예요. 사투리 선생하고 석 달간 합숙하면서 내가 아주 선생을 뻗게 했다고.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억양이 네이티브처럼 안 나와서...그거에 온 신경이 다 가 있어서 맘 놓고 연기를 못했어.”

    -서울 토박이가 따라 하기엔 그 애티튜드가 쉽지 않아요(웃음). 경상도 말은 따박따박, 야무지게 따지기보단 감정을 반 박자 더 당겨서 휘몰아치는 말투죠. 약간 화가 난 듯. 전형적인 서울 양반인 선생의 성정과는 맞지 않는 말투였어요.

    “그래도 노력한 건 보였대요. 그러면 된 거야. 노력은 했다고. 감독이 경주 사람이라 엄마를 경상도 출신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봤지. 나는 그걸 헤아려서 맞춰주고 싶었어요. 내가 미녀 배우도 아니고 끼가 흘러넘치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이병헌처럼 눈이 좋은 배우도 아니고. 그러니 노력이라도 해야지.”

    72세에도 윤여정은 열심히 일한다. “노예근성이 다분할 정도로 노력하는 인간’이 그녀가 말한 자신의 정체성이다.
    -미인은 아니어도 칠리소스처럼 매콤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를 타고 나셨지요. 임상수 감독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나레이션까지도 하지 않았습니까?

    “(손사래를 치며)아우~ 내 목소리는 거부감 1순위야. 내가 미성인 가수들을 좋아하는 것도 내 목소리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처음 해보는 사투리 연기도 그렇고, 예능 다큐 ‘윤식당'의 개업 셰프도 그렇고, 항상 ‘낯선 것'을 받아들이고 숙제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 ‘공부는 못해도 숙제는 해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마음에 오래 남았어요.

    “그게 아들 야단치다가 알았어요. 미국 학교는 성적을 합리적으로 내요. 숙제, 퀴즈, 시험, 출석 이런 것들을 종합하는데, 얘가 숙제를 안 해서 내가 깜짝 놀랐거든. 그 얘길 했더니, 성우 송도순이 “어머, 언니는 숙제 해갔수? 난 안 했는데."하더라고. 나는 누가 미션을 내주면 잘하든 못하든 꼭 해서는 갔어요.”

    -그런 삶의 자세는 누구에게 배웠나요?

    “어머니죠. 우리 아버지가 엄마 나이 서른넷에 돌아가셨는데, 엄마가 우리 세 딸을 아주 용감하게 키웠어요. 어머니가 의과대학에 1년 정도 다닌 적이 있는데, 그걸 밑천으로 양호교사 시험을 쳐서 자식들을 부양했지. 장한 어머니상 받으실 분이에요, 우리 엄마가.”

    -안 받으셨던가요? 장한 어머니상?

    “안 받았어요. 우리 딸들이 줬어요. 그러면 됐지. 상이 다 무슨 소용이야? 우리 엄마도 내가 받은 청룡 영화상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처치 곤란이라고 집 정리할 때 버리셨거든.”

    -‘화녀’로 받은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버렸다고요?

    “그게 뭐 짐만 되고 엿장수도 안 가지고 간다고. 그래도 상을 탔다는 기록은 남아있는 거니까.”

    -그게 꽤 영광스러운 트로피 아니었던가요? 김기영 감독이 그 시절에 ‘내 말을 알아듣는 이가 미스 윤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영리한 여배우로 인정받으셨잖아요.

    “맞아요. 나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감독들의 예쁨을 받았어요. 미모도 재능도 없고 감독들이 디렉팅을 해주면 그걸 최선을 다해 따라갔어요. ‘도구로서 모든 걸 다 하리라' 하는 그런 자세가 있었지요. 나는 창의적인 배우도 못되고, 오히려 노예근성 같은 게 있었나 봐.”

    김기영 감독의 ‘화녀'로 스물 셋에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임상수, 홍상수, 이재용 그리고 지금의 나영석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노예근성이 그들과 함께 찬란하게 꽃을 피웠네요.

    “임상수 감독이 나중에 고백하더군. 그때 ‘바람난 가족'에 나를 캐스팅할 때 내가 세 번째 후보였대요. 간혹 후배들이 ‘이 역할은 당신밖에 못 해요' 이런 말에 혹하는데, 인생에 그런 거 없어요. 알고 보면 나 말고도 열 명 넘게 후보가 대기 중이라고. 홍상수 감독도 아마도 아는 늙은 여자가 나밖에 없어서 불렀을 거야.

    그이가 하는 작품이 다 남녀상열지사인데, ‘하하하' 같은 영화에서도 내가 중요한 역할은 아니었잖아. ‘바람난 가족'이나 ‘돈의 맛' 같은 임 감독 영화들도 아마 다른 나이든 여배우들이 곤란해서 거절했을걸. 노출도 심하고, 섹스 신도 있고… 나야 뭐 그때 급전이 필요해서 했지만(웃음).”

    -최고의 연기는 돈 필요할 때 나온다,는 명언이 그때 나왔지요(웃음)?

    “하하하. 그랬어요. 난 실용주의자였어. 마침 집수리를 해야 했거든. 그런데 이유야 어쨌든 그때 영화 현장에 가보니 많이 달라졌더라고. 어릴 때 정말 고생하면서 영화를 했는데, 나이 들어 현장에 가보니 세상이 달라졌더구먼. 스태프들도 어찌나 세련되고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하던지. 내가 영화 끝나고 ‘바람난 가족’의 엄마는 임 감독이 ‘내 엄마가 이런 모습이었으면'하는 걸 그린 것 같다고 인터뷰를 했더니, 그이가 아주 좋아하더라고.”

    윤여정 자신은 나중에 임상수 감독이 신문에 인터뷰한 내용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했다.

    “TV 배우는 희소성도 없고 기계적으로 연기한다고 생각했는데, 윤여정이 하는 걸 보고 편견이 다 무너졌대요. 앞으로 자기 영화에는 없던 배역을 만들어서라도 윤여정이란 사람을 계속 쓰겠다고. 어찌나 고맙던지, 내가 지금까지 만나면 임감독 밥을 사주잖아. 그이가 천만 영화를 해야 내가 밥을 좀 얻어먹을 텐데(웃음).”

    이재용 감독을 소개해준 사람도 임상수다. “파리 프로젝트를 할 때인데, 함께 밥 먹고 영화 보고 할만한 세련된 사람이 하나 있다고. 그렇게 계속 이어진 거죠.” 그렇게 한 사람의 아내로 받지 못한 사랑을 당대의 세련된 감독들에게 받으며 윤여정의 사이즈는 커졌다. ‘여배우의 가장 큰 매력은 자기 성격’이라고, 삶으로 한 발씩 자신의 말을 증명해가며.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에서 과감한 정사 장면을 소화한 윤여정.
    -일하는 사람들과 재밌게 지내려고 많이 노력하시죠?

    “맞아요. 살아보니 인생이 별 게 아니야. 재밌게 사는 게 제일이야. 내가 미국에서 살다 1985년에 귀국했는데, 사람들 말이 다 딱딱해져 있더라고. ‘왼쪽으로 도세요’ 하면 될 말도 ‘좌회전하세요' 그러고, 말끝마다 ‘의식 있게 살아야 한다’고 하고… 미장원에서도 ‘직모를 유지하실 건가요?’ 이러더라니까. 생전에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도 긴장하지 않으면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듣겠다 하셨거든요. 다들 좀 웃으면서 서로 재밌게들 얘기하면 좋겠어. 나는 너무 무게 잡고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부담스러워서 싫더라고.”

    -산전수전 다 겪고 유머 감각이 풍부해도 긴장할 때가 있습니까?

    “일할 때는 늘 긴장해요. 첫 촬영 때는 특히 긴장을 많이 하지. 언제쯤 나도 편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한 적도 있는데 맘을 바꿨어요. 영원히 긴장하려고. 배우가 너무 편하게 하면 그것도 이상해요. 연기를 잘해서 그냥 노는 것처럼 보이면 그게 농익은 연기인가? 난 아닌 것 같아. 묘한 경계선이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최선'이 보였으면 좋겠어. 처음 만났을 때의 ‘떨림'을 죽을 때까지 유지 하고 싶어. 브로드웨이에도 첫 공연 티켓이 가장 비싸요. 떨림과 최선이 있으니 그런 거 아니겠어요?”

    -‘윤식당'이 대표작이 됐다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배우로서는 어떤 작품을 가장 아낍니까? ‘사랑이 뭐길래' 같은 김수현 드라마도 있고, ‘내가 사는 이유' 같은 노희경 드라마도 있지요. 저는 임상수 감독의 ‘하녀'도 좋았습니다만.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해도 참는다'는 ‘아더메치' 발언이 산뜻했어요.

    “나는 특별히 전성기나 대표작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굳이 꼽으라면 나이 칠십이 넘어 보니 김기영 감독과 했던 1971년 작 ‘화녀'가 기억이 나요. 신인시절의 생생한 모습이 있어서 그런가 봐.”

    -당시 감독이 촬영장에 쥐도 풀어놓고, 컬트적인 야심이 대단하셨다고 들었어요.

    “쥐만 풀었게요? 그분이 정말 기인에 가까우셨어요. 그래도 나를 잘 콘트롤해서 좋은 연기를 뽑아내셨죠.”

    ‘전성기도 대표작도 없다’는 윤여정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봉준호 감독이 김혜자에게 영감을 받아 ‘마더'를 만들고, 나문희가 ‘아이 캔 스피크'로 77세에 여우주연상을 받았듯, 그녀도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에서 주연으로 열연하지 않았던가. 돌아보면 윤여정은 반쯤 혼백이 빠져나간 듯, 여운이 많고 함축적인 연기보다 담백하고 실용주의적이고 딱 떨어지는 배역에 잘 맞았다.

    ‘배우로 사는 게 행복하다’고 느낀 건 60이 넘어서라는 윤여정. 나이가 들었든 젊었든 간에 윤여정만큼 남을 지배하려는 에너지가 없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재미있는 건 감독들이 윤여정에게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신랄한 ‘성적인 매력’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화녀’에서 윤여정은 초기 산업사회에서 이촌 향도한 가정부로 주인 남자와 바람을 피워 가족을 붕괴시켰고,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는 아들 부부에게 “나, 만나는 남자 있다. 가끔 섹스도 해”라고 담배 연기 뿜어내듯 단숨에 선언했다. 이재용은 노인의 자살과 섹스를 돕는 ‘박카스 할머니’로 윤여정을 뒤틀린 채로 화사한 유사 가족의 가장으로 대접했다.

    자기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 여자, 성적인 에너지 ‘리비도'가 넘치는 여자(윤여정은 토크쇼에 나와 자신을 ‘평창동 비구니'로 희화화했지만), 자칫 비호감으로 흐를 수 있는 이 에너제틱한 노인 곁에 깍듯하고 반듯한 이서진과 정유미로 간을 맞춘 나영석의 동시대적인 센스가 놀라울 뿐.

    -일흔이 넘었는데도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며 사랑받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 내가 젊은이들을 좋아해요. 우리는 전쟁을 겪었고 먹고사는 데 급급해서 촌스러운 게 있잖아. 그런데 젊은 애들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 막 신통하고 장하고 그래요. 어른이 어른다워야 한다는 생각은 해요. 애들처럼 똑같이 욕심안내고(웃음), 밥값은 내가 내고(웃음). 난 뭐 대단한 어른은 못돼요. 얼마 전 이미숙이 전화해서 그러더군. 나를 연구해봤더니, 윤여정이 지금 독보적인 존재가 된 게 ‘4차원의 칠십 대'라서 그렇다나(웃음)?”

    -제가 보기엔 4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정상적이라 독보적인 존재가 된 게 아닌가 싶은데요. 독립적이고, 신랄하며, 경우 바르고 ,유머 있는 노인을 주변에서 보기 힘드니까요.

    “그래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가 봐요.”

    -돈과 일에 대해 자기만의 신조가 있으신가요?

    “돈은, 돈은 타고나는 거예요. 우리 엄마 말씀이 작은 돈은 저금해서 모으는 거고, 큰돈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거랍니다. 내 인생도 내가 일해서 번 것 아니면 보너스라는 게 없었어요. 언젠가 누가 권해서 주식을 했다가 모두 날렸어요. 돈 잃은 날, 친구들 모아서 밥 사주고 술 사줬지요.

    일에 대해선 그래요. 나는 60살 까진 하기 싫은 일도 많이 했어요. 아이들 키워야 했으니까. 애들이 장성한 후엔 딱 결심을 했죠.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치를 좀 해야겠다. 61살부터 내가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하고만 일해야겠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만 하면 확실히 돈은 안 돼. 싫어하는 일도 해야 돈이 되지(웃음). 이제는 친구들 술 사주고 밥 사줄 돈만 있으면 되니까.”

    명랑한 타이피스트나 빈틈없는 회계사 같은 목소리로 윤여정은 술집 엄마나 수녀, 정치인의 마담뚜는 물론 연속극의 맹맹한 물김치 같은 시어머니도 연기했다.
    -언제 행복한가요?

    “(골똘히 생각하다)TV는 대사가 많잖아요. 인간이 소화할 수 없는 정도의 대사까지 외워서 다 하고 집에 와서는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해요. 오늘 미션을 내가 잘 끝냈구나..., 그때 행복한 기분이 들었어요. 나는 녹화 전에 불안해서 잠도 안 자고 대본을 닳도록 보고 또 봐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감독도 놀랬다잖아.”

    -평생을 노력한 사람이군요.

    “감사하게도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봤어요. 그러니 노력했지. 나를 칭찬하거나 예쁘다고 해도 믿질 않았어요. 너무 노골적으로 말해서 인심 사나워 보인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다른 사람한테도 진실을 말해줬다고. 알고 보면 사람들도 내가 안 예쁘니까 멋지다고 하는 거잖아(웃음).”

    -과연 72살의 멋진 노인이십니다(웃음). 처음으로 72살을 사는 기분은 어떠신가요?

    “매년 달라요. 우아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점잖게 살고 싶지. 하지만 아직 나도 하루하루가 처음이라 실수하고 성질도 내죠. 유준상이 나한테 보낸 편지가 있어요. ‘선생님은 참 훌륭하시다. 늘 반성하시고 사과하신다. 그런데 또 그러신다.’ 반성하고 사과하고도 또 같은 실수를 한대요, 내가! 그러니 이 나이에도 매일 아주 조금 성숙해지길 바랄 수밖에요(웃음).”

    영화가 여자가 일생을 통해 누리는 행복과 불행의 전조를 미묘하게 포착해내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그녀가 전성기 시절 얼마나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자가당착에 빠져 파멸에 이르는 얼굴을 연기했는지는 사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영화와 예능을 넘나들며 자신의 모든 것을 투명하고 위용 있게 드러내는 72세의 윤여정을 보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연기를 열심히 하는 건 ‘집에 가서 빨리 쉬고 싶기 때문'이라는, ‘칠십이 넘어도 또 실수하더라'는 그 평범하고 정직한 말이 왜 이토록 위로가 되는 걸까. 그리하여 연민과 호기심으로 동그래지는 그녀의 눈과 관용적으로 길어진 인중에 미소를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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