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겉만 보면 사랑 편지, 그 속에 담긴 '데이트 폭력'

    입력 : 2018.01.13 03:02

    여동생 잃고 '사랑의 이름'展
    前남자 친구에 살해당해… 가해자 편지엔 "사랑해"
    "사랑으로 포장된 폭력성 알리기 위해 전시 기획"

    데이트 폭력으로 동생을 잃은 윤모씨는 ‘사랑의 이름’이란 전시회를 마련했다. 봉투(위 사진)엔 사랑의 언어가 적혀 있지만, 연인 간의 살인 등 데이트 폭력 사건 기사를 필사한 편지(아래 사진)가 들어 있는 미술 작품이 전시됐다./
    데이트 폭력으로 동생을 잃은 윤모씨는 ‘사랑의 이름’이란 전시회를 마련했다. 봉투(위 사진)엔 사랑의 언어가 적혀 있지만, 연인 간의 살인 등 데이트 폭력 사건 기사를 필사한 편지(아래 사진)가 들어 있는 미술 작품이 전시됐다./ 윤씨 제공
    지난달 27일부터 서울 대림동의 한 카페에 '사랑의 이름'이란 전시가 열렸다. 전시장 책상 위에는 '사랑하는 내 여자 친구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그게 바로 너야' 등의 문구가 적힌 형형색색 편지 수십 통이 놓여 있었다.

    얼핏 연서(戀書)로 보였다. 봉투를 열면 반전이 있었다. 편지지엔 '법원, 여자 친구에게 염산 부어 살해한 50대 중형 선고' '이별 통보에 여자 친구 살해하고 애완견까지 세탁기에 넣고 죽인 남성' 같은 제목의 사건 기사가 적혀 있었다. 모두 전시 기획자인 윤모(30)씨가 실제 일어난 사건 기사를 찾아 필사한 것이다. 개막한 날은 원래 그의 생전의 동생이 교환학생으로 미국 출국이 예정된 날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그 한 달 전 이전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살해됐다. 전시는 윤씨가 동생, 그리고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윤씨는 원래 준비 중이던 전시를 엎고 이 전시회를 열었다. "장례를 치르고 동생 방에서 물건을 정리하다가 가해자 편지를 발견한 뒤 떠올린 기획"이라고 했다. 동생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해자의 편지엔 '공부와 네가 하는 일들이 다 잘되길 바란다' '사랑하는 너를 위해 나도 열심히 살겠다'는 다정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윤씨 동생도 생전에 가해자를 참 좋은 애라고 하곤 했다. 죽던 날에도 엄마에게 "한 번만 더 만나달래요. 너무 불쌍한 애"라고 말하며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착하고 불쌍한 애'는 윤씨의 동생을 살해하고, 본인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윤씨와 부모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다. 의문을 풀기 위해 데이트 폭력과 관련한 보도를 찾아보면서 윤씨는 지금껏 무관심했던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됐다고 한다.

    윤씨는 "나 역시 동생이 죽기까지 위험을 막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며 "내 주위의 친구들도 자신이 당한 데이트 폭력에 대해 이야기해주면서 연인 사이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있는지 깨닫게 됐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데이트 폭력은 징후를 감지해 예방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가정 폭력 문제처럼 연인 관계 역시 제삼자가 개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큰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방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근절이 어렵다는 것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2007년부터 10년간 데이트 폭력으로 형사 입건된 사람은 연평균 7900여명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데이트 폭력은 크게 늘지도 줄지도 않고 매년 꾸준한 숫자를 유지하는 게 특징"이라며 "통계엔 형사 입건된 폭행이나 강간, 살인만 잡히기 때문에 언어 폭력 등까지 합하면 훨씬 규모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에선 데이트 폭력의 징후를 가늠할 수 있는 체크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한남대 경찰학과 박미랑 교수는 "데이트 폭력은 보통 사회에서 '사랑싸움'이라고 생각해 주위에서 돕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며 "제도적인 사후 처벌 강화도 필요하지만 연인 관계에서 위험 징후를 빨리 파악하고 먼저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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