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삼성보다 나라를 더 걱정했다는 창업주, 그가 살아 돌아온다면…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01.13 03:02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9) 이병철(1910~1987)

    우리 집에서 냉면 먹다가 액자 유리 깨뜨렸지만 그는 한마디도 안했다
    다음날 삼성 사람들이 커다란 냉방기 들고 와…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들은 병상에 누웠고 손자는 철창 안에… 이병철이 살아 돌아온다면 무슨 말을 할까

    이병철 일러스트
    이철원 기자

    이병철은 경술국치 6개월쯤 전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생했다. 대대로 벼슬하던 조상을 가진 명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벼슬을 안 했지만 넓은 농토를 가진 지주였다. 고향에서 교육을 받다가 서울에 있는 수성국민학교로 진학했는데 그가 쓴 자서전에 의하면 성적이 반에서 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적이 안 좋은 원인은 분명히 있었다. 이병철이 어려서 경상도 사투리를 하도 심하게 써 서울 아이들에게 구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가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것은 1929년의 일이다. 공부 열심히 한 것도 사실이지만 틈이 생기는 대로 여러 곳의 공장들을 시찰하였다니 어쩌면 기업인의 꿈을 그때 이미 품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병철은 건강이 매우 악화돼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서 3년 차에 자퇴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건강을 되찾고 그는 장사할 만한 곳을 물색했다. 서울, 부산, 대구 등지를 두루 다녀 봤지만 고향에서 멀지 않은 마산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친구 둘과 함께 그곳에 도정 공장과 합동 정미소를 차렸다. 그것이 1936년이었는데 중일전쟁이 터진 여파로 사업이 부진해 정미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빚을 다 갚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 번 실패로 기업가의 꿈을 접을 이병철은 아니었다. 1938년 대구에서 3만원의 자본금을 마련해 삼성상회를 시작했다. 3년 뒤에는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도·소매하는 한편 중국으로 수출하는 일도 했다. 그가 삼성물산을 창립한 것은 해방 뒤 2년이 지난 1947년의 일이었다. 제일제당, 제일모직부터 점차 사업을 확장해나간 사실은 국민이 잘 알고 있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삼성전자도 그렇다.

    나는 기업인 이병철은 잘 모른다. 그의 사생활은 더욱 모른다. 다만 전 세계의 어떤 도시에 가나 SAMSUNG이라는 상표를 대하게 되고 특히 삼성전자는 전 세계가 알아주는 우수한 기업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모른다.

    여러 해 전에 이병철과 함께 우리 집에서 냉면과 빈대떡을 같이 먹은 적이 있다. 그때 저녁 자리가 2층에 마련돼 있었는데 그가 그 방에 들어서면서 벽에 걸린 액자를 하나 잠깐 건드린 일이 있었다. 잘못 걸려 있던 탓에 그 액자는 온돌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손님도 미안했겠지만 주인은 더 미안했다. 물론 유리만 깨졌지 이유태 화백의 산수화는 그대로 있었다. 사람을 불러 깨진 유리를 치우고 나니 그 '불상사'는 완전히 해결됐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손님으로 온 이병철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손님이 미안하다고 하면 주인은 더 미안할 수밖에 없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여름철이라 그 방이 좀 더웠던 것은 사실이다. 이튿날 삼성에서 사람들이 왔다. 커다란 냉방기를 하나 들고. 이병철과 저녁을 함께 한 그 방에는 최신 냉방기가 하나 달렸고 거기서 시원한 바람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이병철은 그런 사람이었다.

    잊히지 않는 일이 또 하나 있다. 용인에 삼성이 경영하던 자연농원이 있었고 그 안에 연수원이 생겨 사원들의 각종 연수도 진행했다. 나도 한 번 강사로 초빙돼 회사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연수원에 간 적이 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운전 기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병철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의 일이다. "제가 회장님의 출퇴근을 맡아서 여러 해 모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회장님은 삼성보다 나라를 더 걱정하신 분입니다." 나는 그 한마디를 들으며 가슴이 찡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었어도 이 회장과 측근에게 그 말을 전해 줄 기회도 없는 것이 명백한데 그 기사는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줬을까. 삼성이 내 가슴에, 그리고 모든 한국인의 가슴에 한국인으로서의 커다란 긍지를 심어준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삼성보다 나라를 더 걱정했다"는 삼성 창업주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쓰는 새벽, 내 눈에는 인생이 아름답게 보이질 않는다. 왜 이다지도 괴롭고 불공평한가 하는 생각이 앞서 붓을 던지고 한참 눈을 감았다. 유능하다고 소문났던 이병철의 아들은 병상에 누운 지 벌써 몇 해째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이목구비가 수려한 이병철의 손자는 받들어야 하는 나라 어른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 '죄' 때문에 오늘도 철창 안에 갇혀 콩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그가 거처하는 집은 커서 '큰집'이라고 하지만 방은 매우 좁다. 나도 살아봐서 안다. 손자도 할아버지를 닮았다면 삼성보다 나라를 걱정하며 쭈그리고 앉아 있겠지.

    오늘 이병철이 살아 돌아와 삼성의 회장실에 잠시 들른다면 그는 몰려든 기자들에게 뭐라고 할까 궁금하다. 혹시 '삼성은 망해도 대한민국은 살려야 합니다'라고 하지 않을까. 그러나 곧이어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경제도 무너질까 걱정입니다'라고 하지 않을까. 이 나라에 태어난 사실이 오늘 새벽에는 조금도 자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도 몰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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