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준비한 '초등교과서 한자 표기' 슬쩍 폐기

조선일보
  • 주희연 기자
    입력 2018.01.11 03:04 | 수정 2018.01.11 08:11

    교육부, 2014년 표기 방안 추진
    공청회 거쳐 최종 발표까지 해놓고 외부에 안 알리고 일방적 철회
    사교육 걱정 없다더니 입장 돌변… 이젠 "사교육 우려 때문에 폐기"
    "정권 입맛 따라 바꾼 것" 비판

    초등학교 5~6학년 교과서에서 어려운 학습 용어의 뜻과 한자 음(音)을 풀어주는 '한자 표기 정책'을 2019학년도부터 시행하려던 교육 정책이 돌연 폐기된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부는 초등 한자 표기를 확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2014년부터 2년간 정책 연구와 의견 수렴 등을 거쳐 2016년 말 이 정책을 발표했다. 그런데 새 정부 들어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한자 표기 정책을 은근슬쩍 폐기해버린 것이다. 교육부가 최근 전국 유치원·어린이집 5만곳의 방과 후 영어 수업 금지 정책을 학부모 등의 의견 수렴도 하지 않고 전격 시행하려던 것과 맞물려 "교육 정책이 정권 입맛에 따라 죽 끓듯 바뀐다"는 비판이 나온다.

    2년 넘게 준비해 놓고 돌연 폐기

    교육부는 2014년 '2015 개정 교육과정'을 만들면서 "새 교과서에는 초등학교 한자 표기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학습 용어에 한자가 많아 학생들이 한자의 뜻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많다는 이유였다. 그때부터 '초등 한자 병기(倂記)' 논란이 일었다. 일부 시민 단체는 본문의 한글 단어 옆에 한자를 함께 쓰는 '한자 병기'에 대해 "한글 전용 원칙에 어긋난다" "사교육을 확대한다" "학생들 학습 부담이 커진다"는 이유로 반발했다.

    이후 교육부는 공청회와 정책 연구 등을 거쳐 2016년 12월 최종 방안을 발표했다. 교과서 본문에 한자 병기는 하지 않고, 교과서 여백(옆단이나 밑단)에 별도로 학습에 도움 되는 용어의 음과 뜻을 풀어쓰는 방식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예컨대, 과학 교과서 본문에 '항성'이라는 용어가 나오면, 페이지 하단에 '항성(恒星): 항상(恒, 항상 항)'이라고 알려주는 식이다. 이를 위해 교과서에 많이 쓰이는 주요 한자 300자를 골라 이 범위에서만 한자의 음과 뜻을 표기하도록 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1년이 흐른 지난달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이 정책을 돌연 폐기했다. 교과서 개발자들이 참고하는 '교과용 도서 개발을 위한 편수 자료' 수정판을 교육부 홈페이지에 올렸을 뿐, 언론 등에 공개하지는 않았다. 전 정부 때 이 정책을 추진한 남부호 교육부 교육과정정책관은 "(한자 표기 정책이) 시행되기 전이라 (교육 현장에서) 바뀌는 게 없어 알리지 않았다"면서 "정부가 한자 300자 기준을 제시하면 사교육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아 정책을 폐기하게 됐다"고 밝혔다.

    "교육부, 180도 입장 바꿨다"

    하지만 이 해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1년 전 교육부가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를 추진할 당시 일부 진보 교육 단체와 한글 단체들이 "학생들의 학습 부담이 커지고 사교육이 횡행할 것"이라고 비판하자 당시 교육부는 보도 자료에서 "한자 표기는 한 단원에 0~3건 정도로, 개념 이해를 돕는 경우에만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학습량과 수준에서 모두 학습 부담이 거의 없다"고 밝혔다. 또 "한자를 외우거나 평가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사교육 부담도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정책을 폐기하면서 "학생들의 학습 부담과 사교육 유발이 우려되기 때문"이라는 정반대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1년 만에 입장이 180도 달라진 것이다.

    교육부가 내·외부 압력으로 정책을 바꾼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교육부는 지난해 9월 사단법인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에 보낸 공문에서 "초등 5~6학년 때 한자를 배우는 것이 학습 효과가 높고 적정 한자 수(300자)는 교사·학부모·학계·시민 단체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 결과"라고 밝혔다. 전광배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사무국장은 "4개월 전만 해도 기존 정책 추진에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는데 정부가 아무 설명 없이 정책을 갑자기 폐기한 것은 밀실 행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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