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의 훈장

입력 2018.01.11 03:15

現정부 들어 '촛불 그림' 滿開
인간에 대한 연민과 성찰 없이 혐오스러운 동물로 희화화
분노만 가득한 그림은 '선동'… 全體主義로 흐를 위험성도
권력에 대한 줄 세우기 없어야

김윤덕 문화1부장
김윤덕 문화1부장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겨울, 서울 광화문에 '궁핍현대미술광장'이란 천막이 들어섰다. '국립현대미술관'을 패러디해 문패를 단 그곳은 이른바 '블랙리스트'로 찍힌 화가들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천막 안 공기는 살벌했다. 국회에 걸어 사달이 난 박근혜 누드 풍자화는 양반이었다. 여성 대통령은 탐욕으로 뒤뚱대는 암탉, 머리에 뱀이 똬리를 튼 사악한 마녀로 그려졌다. 급조된 그의 조형물엔 거대한 주삿바늘이 목을 관통했다. 기업 총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중의 적(敵)'으로 끌려온 재벌들은 포승줄에 묶여 인민재판을 받는 형국으로 묘사됐다. 권력을 향한 날 선 풍자, 질펀한 해학은 없었다. 예술이 아닌, 분노의 배설물이었다. '블랙리스트'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그림들엔 10만원에서 100만원의 작품가가 매겨져 있었다.

임옥상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린 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3개월 뒤다. '민중미술'로 명명된 리얼리즘 미술의 간판 주자라 화단의 관심이 컸다. 민들레 꽃씨를 하나하나 붙이고, 흙을 갠 물감을 켜켜이 쌓아 그린 민초들 삶의 희구(希求)가 뭉클했다. 문제는 '나는 원조 블랙리스트'라는 작가의 강박이었다. 전직 대통령과 기업인들을 혐오스러운 바다 동물들로 희화화해 뒤엉켜 놓은 그림은 천막 안 삼류 민중미술과 다를 게 없었다. 촛불 시위를 오마주한 대작(大作)도 걸렸다. 황금빛으로 한껏 숭고미를 입혔으나, '닥치고 아웃' '이게 나라냐' 같은 구호 사이로 촛불 정치인들 얼굴이 보여 씁쓸했다. 이 작품은 두 달 뒤 청와대 본관에 걸렸고,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작가의 그림값은 두 배로 뛰었다.

2016년 11월 4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예술행동위원회 주최로 열린 '박근혜 퇴진 블랙리스트 예술가 시국선언'에서 참가자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과 탄핵을 요구하는 가운데 화가 임옥상씨가 박 대통령 조롱 포퍼먼스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임옥상을 필두로 '촛불 그림'이 곳곳에서 만개한 건 우연이 아니다. 한 대형 전시엔 산수(山水)만 그리던 화가의 그림에 노무현·문재인 전현직 대통령 얼굴이 등장해 뒷말을 낳았다. 화랑가 전람회엔 추상·구상을 막론하고 촛불을 은유한 작품들이 '부록'처럼 한 점씩 걸렸다. 전(前) 정권에서 권력을 풍자했다 벌금형을 받았다는 한 무명 화가의 해괴한 그림들을 '균일가'로 판매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흔히 민중미술가들은 자신을 '오윤의 후예'라 부른다. 오윤은 1980년대 민중미술 전성기를 이끈 '전설'이다. 똑같은 민중미술이지만 오윤의 판화가 지금도 감동을 주는 건, 민중의 고통을 익살과 신명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시인 김지하는 "한(恨)과 그늘, 귀곡성(鬼哭聲)마저도 흥과 신바람이 터져 나오는 오윤 예술의 정점"을 가리켜 "봄이자 사랑"이라고 했다

오늘의 민중미술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건,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조차 분노를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승화시킨 작가의 치열한 성찰이 보이지 않아서다. 촛불을 마치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인 양 떠받드는 모습은 더욱 민망하다. '1987'은 온 나라를 하나의 함성으로 물결치게 했지만, '촛불'은 나라를 두 쪽으로 갈라 놓았다. 이를 품어 안을 고민 없이 응징과 조롱, 악다구니로 가득한 그림은 선동이지 예술이 아니다. '제2의 오윤'으로 불렸던 민중미술 판화가 이철수가 돌연 제천 박달재로 내려간 건, 독일에서 만난 한 비평가의 뼈아픈 충고 때문이었다. "너의 그림에선 전체주의 냄새가 나."

미술계까지 불어닥친 '블랙 열풍'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지금이라도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없을까"라는 작가들 농담은 대개 진심일 것이다. 대통령이 블랙리스트 예술인들을 만나 훈장을 주듯 격려하는 모습이 권력에 대한 줄 세우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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