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연극 베테랑… "예능으로 알려져 부끄러워요"

    입력 : 2018.01.06 03:01

    연극 '발렌타인 데이' 주연 정재은, 최근 예능서 활약해 신인상 받아
    "정동환, 공연 보고 울며 안아줘… 연기로 인정받은 느낌… 안심돼"

    "내가 스스로 원했던 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사랑하게 된 겁니다. 사랑은 무관심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탁자 위에 올라선 발렌티나(정재은)의 5분여 독백이 끝난 뒤 객석은 마법에 홀린 듯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헤집어놓은 사랑에 대해 한 줄 한 줄 읊어내려 가는 정재은의 호흡을 관객들도 함께 뱉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묵직하고 고상한 발성에 힘이 실릴수록 객석에선 훌쩍이는 소리가 짙어졌다.

    연극‘발렌타인 데이’무대인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만난 배우 정재은은“연기자로 진정 인정받고 싶은 욕심 아닌 욕심이 생겼다”며 웃었다.
    연극‘발렌타인 데이’무대인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만난 배우 정재은은“연기자로 진정 인정받고 싶은 욕심 아닌 욕심이 생겼다”며 웃었다. /고운호 기자
    이윽고 박수가 뜨겁게 쏟아졌다. 러시아 원작 연극 '발렌타인 데이'(연출 김종원)가 공연되는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는 배우의 마지막 독백보다 더 긴 시간의 환호로 뒤덮였다. 지난달 23일 막을 올려 연일 만석(滿席)을 기록하는 작품이다. '연극 비수기'인 겨울 무대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연극배우 정재은(49)은 TV에서 좌충우돌하던 '우럭(우아한 럭비공) 여사'로 더 익숙할지 모르겠다. "잠깐 여행이나 다녀오는 줄" 알았던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예능인'이라 불리며 지난해 연말 신인상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연기 경력 30년 가까운 베테랑 연기자다.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 주시고 상까지 주시니 감사하죠. 남편이 붙여준 '우럭 여사'란 별명이 또 그렇게나 좋을 수 없기도 했고요. '당신 진짜 절묘하다!'며 칭찬해줬거든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기 생활을 그렇게 오래했는데 배우, 연기자가 아닌 예능인으로 알려지니 창피하고 부끄럽더라고요."

    극중 발렌티나(정재은·앞)가 발렌틴(이명행)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
    극중 발렌티나(정재은·앞)가 발렌틴(이명행)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 /예술의 전당
    4일 만난 정재은은 마치 클래식 라디오 DJ처럼 그윽하게 말을 이어갔다. "엊그제 정동환 선생님과 윤호진 연출가께서 보러 오셨는데 공연 뒤 꽉 안아주면서 너무 좋다고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그제야 좀 안심되고 이제야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주인공 성격이 워낙 강인한 데다 오랜만에 보는 정말 연극적인 연극이라 설레면서도 힘들었거든요. 공연 때마다 수명이 5년씩은 단축되는 것 같았다니까요."

    오는 14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연극은 60세가 된 반백의 발렌티나 시점으로 시작한다. 18세 때 만난 발렌틴(이명행)과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오해로 헤어지게 되고 서른다섯에 발렌틴을 우연히 만나 또다시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발렌틴은 이미 까쟈(이봉련)의 남자. 세상을 떠난 발렌틴의 집에서 발렌티나와 까쟈가 기묘한 동거를 하면서 셋이 얽힌 과거를 하나씩 풀어낸다.

    "저도 마흔 다돼 지금 남편을 만났어요. 제 인생은 남편 서현철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모든 게 변했지요. 긍정적으로요! 하지만 제가 살아보니 그래요. 아무리 좋은 관계의 부부라 하더라도 그는 그 사람이고 저는 저더라고요. 아무리 사랑해도 여자와 남자는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연극에서처럼요. 마지막 대사처럼 '그냥 왔고, 전쟁 같았고, 그러다 가는' 게 인생이고, 결국은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것 같아요."

    그는 격정적인 연기 톤과는 다르게 담담한 표정이었다. 뒤늦게 결혼해 소중한 딸을 얻었고, 예능 데뷔도 하고, 섭외도 물밀듯 쏟아진다. 예능에서 붙은 별명 덕에 제의받는 역할도 대폭 다양해졌다. 이전에는 강하고 도도하거나 갑질하는 강남 주부였다면 이제는 편하고 순수한 느낌의 배역도 여럿 들어온다.

    하지만 행복과 고통은 교차 편집되듯 그의 삶을 파고들었다. 그는 2년 전 유방암 치료를 받았다는 어려운 고백을 꺼냈다. 그가 아픈 동안 최근까지 연극계 친한 선후배 여럿을 암으로 잃었다. "10년 뒤 60세가 되고서도 철 안 든 배우 정재은으로 계속 무대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행복하게 살기에도 짧은 게 인생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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