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다이어리

조선일보
  • 성유진 기자
    입력 2018.01.03 03:03

    세브란스 소아 중환자실 간호사
    아이 맘대로 못보는 부모들 위해 "인공 호흡기 드디어 뗐어요" 등 치료과정·일상을 사진·글로 남겨
    일기장 통해 환자 가족과 소통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아이들은 하루 두 번, 20분씩만 부모를 만날 수 있다. 이 짧은 시간에도 혹여나 탈이 날까 봐 아이에게 손조차 대지 못하는 부모들이 많다. 중환자실 간호사와 의사들이 이런 부모들을 위해 다이어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무슨 행동을 했는지 매일 사진을 찍고 글씨를 적어 아이 옆에 놓아뒀다. 9월부터 작성한 다이어리가 이제 40여 권으로 늘었다.

    지난 2일 심장혈관병원 4층 중환자실. 소아 환자 칸막이 쪽 침대에 아기 세 명이 누워 있었다. 생후 18개월 된 고서경군은 심장 근육이 점점 약해지고 딱딱하게 굳는 병을 앓고 있다. 지난 11월 심장 보조 장치를 다는 수술을 했다. 서경이의 입원방 한쪽에는 다이어리 두 권이 놓여 있다. 매일 의료진들이 글을 남겼다. '너무너무 이쁜 서경아 안녕♡ 치즈도 알아서 손으로 뜯어먹고 빵도 집어 먹고 하는 모습 보면 다 컸구나' '선생님이 서경이 무섭지 않게 잘 봐줄게!' 서경이가 숟가락질하는 사진도 찍어 붙였다. 그 사진 밑에 서경이 어머니가 글을 남겼다. '서경이가 스스로 숟가락질을 하다니! 엄마는 너무 놀랍고 감동했어.'

    2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병원에서 의료진이 소아 환자를 위해 만든 다이어리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2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병원에서 의료진이 소아 환자를 위해 만든 다이어리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조현근 흉부외과 전공의, 신유림 소아심장혈관외과 교수, 임성현 간호사, 한민영 간호파트장, 장서윤 간호사. 다이어리에는 아이들의 치료 경과와 행동 일지, 의료진·가족들의 응원 메시지 등이 적혀 있다. /오종찬 기자
    처음 다이어리를 제안한 건 18년 차 간호사 한민영 파트장이었다. 지난 4월 한 파트장은 면회 온 부모들이 침대 곁에서 하염없이 아이를 바라보는 모습을 봤다. 2~3㎏에 불과한 아이 몸에는 각종 치료선들이 연결돼 있었다. 혹여 그 선을 건드릴까 봐 부모들은 아이에게 손도 뻗지 못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아픈데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며 눈물을 보였다. 수술 직후 아이들은 보통 진정 수면 상태라 부모가 면회를 와도 아이의 잠든 얼굴만 보고 갈 때가 많았다. 한 파트장은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하는 부모들이 아이들과 교감할 방법을 계속 고민했다"며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는 중환자실 기간을 최대한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겨주고 싶었다"고 했다.

    한 파트장은 9월 초 다이어리를 만들자고 정식으로 제안했다. 의료진들이 바로 동참했다. 박한기 소아심장혈관외과 교수는 사비로 '소형 사진 인화기'를 들여왔다. 간호사들은 다이어리로 쓸 연습장과 글씨를 장식할 스티커를 잔뜩 사 들고 출근했다. 임신 6개월 차인 임이수 간호사는 "부모가 될 준비를 하다 보니 소중한 아이가 아파 힘들어하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며 "보고 싶어도 마음껏 아이를 만날 수 없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다이어리에는 투석을 한 날, 인공호흡기를 떼고 스스로 숨을 쉰 날, 심장이식을 한 날 등 중요한 치료 기록이 적힌다. 처음으로 콧줄을 떼고 스스로 밥을 먹은 날 등 아이가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글들도 적혀 있다. 보호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에크모(ECMO·체외순환장치)' 같은 전문 의료용어 대신 '오늘은 심장과 폐 기능을 도와주는 어마어마한 기계장치를 떼는 날이야' 같은 말로 쓴다.

    처음에는 한 살 이전의 신생아를 대상으로만 다이어리를 썼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다른 부모들이 직접 다이어리와 스티커를 사와 부탁하는 경우가 많아져 지금은 나이 제한 없이 만드는 중이다. 신유림 소아심장혈관외과 교수는 "보호자분들이 다이어리를 통해 의료진을 더 믿게 되면서 우리도 '힐링'을 받고 있다"고 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허가을군 어머니는 "생후 3개월 된 아기를 처음으로 떼어놓으면서 마음이 정말 아팠다"며 "'아이 상태가 정말 좋아질까' 늘 마음 졸였는데 다이어리를 통해 의료진들이 아이를 잘 돌봐주고 있다는 걸 확인해 안심할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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