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문학평론] '사이'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이제니의 시 읽기

  • 소유정

    입력 : 2018.01.01 03:00

    ※이 글은 이제니의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창비·2010)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문학과지성사·2014)를 대상으로 한다.

    소유정

    1. ‘사이’의 심연, 말(言)의 탄생

    여기 하나의 ‘사이’가 있다고 하자. ‘사이’의 양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쉽게 범하는 오류이지만 사실 ‘사이’ 이전에 선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령 ‘너’와 ‘내’가 있을 때, ‘우리’의 ‘사이’는 ‘너’와 ‘나’로 인해 맺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이’가 있기에 ‘우리 사이’에서의 ‘너’ 그리고 ‘나’로 의미가 결정되며, 나란히 마주설 수 있는 것이다. 행여 ‘너’와 ‘나’의 연결고리가 사라지더라도, ‘사이’만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은 계속해서 순환하며, ‘사이’의 양자는 ‘사이’를 통해 배태된다(김동규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그린비·2009, 13~14쪽).

    다시 말해 ‘사이’는 일종의 모체이자 시원(始原)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시의 경우에도 종종 ‘사이’는 시가 태어난 자리 그리고 반복해서 회귀하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제니 시의 경우가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사이와 사이사이에 한 줄의 시가 있다”(‘태양에 가까이’)는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제니는 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시가 있는 자리를 섬세하게 더듬으며 그것을 시작(時作)으로 삼는다. 그가 매만지는 “사이와 사이사이”는 시가 되는 말(言)들이 태어나는 세계이다. 첫 번째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언급한 것처럼 “슬프고 이상하고 아름다운 낱말들이 도처에서 차오”(‘시인의 말’)르는 세계, 이 세계에서 이제니는 끊임없이 피어나는 낱말을 보고, 듣고, 만지며 감각한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붙어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페루’ 부분)

    “히잉 히잉”하는 말(馬)의 울음소리와 함께 탄생한 말(言)을 보자. 그런데 이제니는 이 말에 대해 갓 태어난 생명의 온기나 생의 성스러움을 예찬하기보다, “무의미하게 엉겨붙어”있고 “미쳐버린 채로 죽”으며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것이라 말한다. 말의 본질은 사실 이렇다는듯 말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알맹이처럼 말을 아끼는 사람”(‘옥수수 스프를 먹는 아침’)이라 정의하는 이에게 말이란 “말하지 못한 말들”(‘공원의 두이’ ‘카리포니아’ ‘편지광 유우’ ‘녹색 감정 식물’),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이며, 소리 내지 못하고 ‘공책’ ‘노트’ ‘백지’에 적을 수밖에 없는 말들(“소리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공책에 백 번 적는다”(‘피로와 파도와’), “차마 소리내 말하지 못하고 노트에 적었던 문장”(‘녹색 정원 금발령’), “무수한 말이 적힌 백지를 간직한 채”(‘그늘의 입’))이다. 이처럼 차오르는 말들을 느끼기는 하지만 말하지 못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말들이 시적 주체가 삼켜 뱉을 수 있는 온전한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율격 없이 절연되어”(‘곤충 소년이 전진한다’) “오해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고 “이해라는 말로 오해”(‘그늘의 입’)될 수 있는 불완전한 언어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페루’와 같이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고 “말이 없는 사람”도,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는 말의 자리를 찾아 떠난다. 시에서 나타나는 ‘요롱이’ ‘두이’ ‘뵈뵈’ ‘카리포니아’ ‘녹슨’ ‘유우’ ‘밋딤’ ‘하치’ ‘홀리’ ‘자니마’ ‘모리’ ‘라이라’ ‘알파카’ 등의 낱말이 그러한데, 이는 하나같이 기의가 분명하지 않고 기표만이 부유하는 것들이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 “연관 없는 어휘들”(‘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낱말은 이제니가 깊이 천착하는 ‘사이’, 즉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언어의 심연” 속에서 “이제 막 떠올랐다 사라져버린 완벽한 문장”이자 “오래전 잃어버린 문장”을 이루는 파편과 같다. 시인은 이 파편을 그러모아 ‘잃어버린 문장’을 맞춰 나가는 작업을 함으로써, 토막 나고 흩어진 채 오해가 될 수 있는 말 대신 “더듬거리는 중얼거림”(‘별 시대의 아움’)일지라도 자신의 말, 자신의 언어를 가져보고자 한다. 그의 “더듬거리는 중얼거림”은 “과연 내일이 와도 요롱요롱 밥을 먹고 요롱요롱 울다가 요롱요롱 잠들고 요롱요롱 깨어나 요롱요롱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을까.”(‘요롱이는 말한다’), “그러지 말고 뵈뵈,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뵈뵈.”(‘뵈뵈’), “카리포니아 카리포니아 카리포니아에 있는 누이에게 편지를 쓴다.”(‘카리포니아’)처럼 주로 부유하는 기표들의 반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낱말의 놀이’(Spiel des Wortes)와 맥락을 같이한다. 단순히 단어 조합의 말장난이 아니라 “숨기는 동시에 드러내는 것/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는 것”(‘그곳에서 그곳으로’)으로, 낱말의 의미는 은폐함과 동시에 떠오르는 기표 안에 내재돼있는 존재 자체의 놀이로 행해지는 것이다.

    이곳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말이 다시 죽어가는 바다/ 밀려갔다 밀려오는// 다시 태어나는 말이 달립니다/ 빛나고 아름답게, 빛나고 아름답고 쓸쓸하게/ 당신은 고아의 말의 그 단단한 등에 앉아 당신의 몸 위에 덧난 것들이 출렁출렁 흔들리는 진동을 듣고 있습니다// 당신은 넘실대고/ 고아의 말과 한 몸으로 넘실대고/ 바다는, 고아는 해변은, 매순간 다른 리듬으로 밀려갔다 밀려오고// 슬픔을 따라가면 슬픔의 끝이 나옵니다/ 슬픔의 끝을 따라가면 더 깊은 슬픔의 끝으로.(‘고아의 말’ 부분)

    이제니가 ‘사이’라는 ‘존재의 심연’(Abgrund)에서 건져 올린 시어를 부르고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부재하는 그러나 현존하는 존재를 가까이 할 때, 낱말은 그에 응답하듯 그 자체의 유동성을 갖고 리듬을 만들어내며 함께 놀이한다. 놀이함으로써 말은 더 이상 “혼자 울면서, 울면서 혼자 달려가”거나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말”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말과 한 몸이 된 주체는 말을 ‘혼자’ 외롭게 두지 않기를 선택하며 긴 여행을 시작한다. “더없이 검은 말을 따라. 한없이 희미한 걸음으로. 방향 없는 방향을 향해.”(‘나선의 감각―목소리의 여행’) 그가 묻는다.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이제 우리 무엇을 할까.”(‘발 없는 새’) 말이 답한다. “슬픔을 따라가면 슬픔의 끝이 나옵니다/ 슬픔의 끝을 따라가면 더 깊은 슬픔의 끝으로”.


    2. 나선의 이미지―소리를 따라, 그림자를 따라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지. 말없이. 손나팔을 불듯 두 손을 흔들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춤을 추면서. 머나먼 반도의 끝자락을 떠도는 이름 없는 유랑 악단처럼. 멈추면 사무칠까 봐 더 더 걸었지. 뒤처진 쪽을 슬쩍슬쩍 바라보면서. 서로가 서로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면서. 언제나 언제나 그렇게 걸었지. 언제나 그렇게 걸어왔지. 춥고 어두운 길에선 더더욱 더.(‘먼 곳으로부터 바람’ 부분)

    말을 따라 슬픔을 따라 당도한 곳은 다름 아닌 ‘고아의 말’이 서있던 그 자리, ‘고아의 해변’이다. 사실 이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고아의 말’의 첫 번째 연과 마지막 연에서 “이 슬픔을 따라가면 고아의 해변” “이 말들을 따라가면 다시 고아의 해변으로”라고 언급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말은, 말과 한 몸이 된 주체는 다시 고아의 해변으로 돌아오는가?

    명징한 첫 번째 이유는 ‘고아의 해변’이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말이 다시 죽어가”고 또 “다시 태어나는” 즉 ‘사이’의 심연과 같기 때문이다. ‘사이’가 시원(始原)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말과 주체는 태어나 죽더라도 운명적으로, 필연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이제니의 시에서는 말 또는 시적 주체가 삶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결국에는 ‘사이’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나는 이 생을 두 번 살지 않을 거야/ 완전히 살고 단번에 죽을 거야”(‘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하고 다짐하지만 “떠나온 자리를 매순간 들여다”(‘요롱이는 말한다’)보고 “사라지기 위해 죽어가기 위해 다시 태어나기 위해”(‘처음의 들판’)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자니마와 모리씨’) 것이다. “저주처럼 돌아오는 말”(‘그곳에서 그곳으로’)처럼. “소멸 직전의 거리”(‘고양이는 고양이를 따른다’)를, “거리와 거리 사이”(‘검은 것 속의 검은 것’)를, “멀어지는 물결과 물결 사이” “기억나지 않는 말과 말 사이”(‘어둠과 구름’)를, “순도 높은 목소리 사이사이로” “어떤 나지막한 목소리 사이사이로”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 그 사이와 사이. 다시 그 사이와 사이사이의 사이”(‘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를 향해.

    이것은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사라진 줄 알았던 목소리가. 녹색을 띤 그늘 속 이끼처럼. 둘로 나뉜 하나의 물방울처럼. 밤과 낮의 경계 너머로 되살아나. 낱말을 발명하는 사람의 입술 주름 위로.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가져가듯이. 어떤 간격. 어떤 틈. 접힌. 닫힌. 시간 혹은 장소의. 영원과도 같은 한순간을. 펼쳐보려는. 열어보려는.// …이해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해한다. 가지 못한 그곳으로 가면서. 그곳으로 다시 가면서. 계단이 있고. 창문이 있고. 강물이 있고. 잿빛이 있고. 희망이 있고. 한낮이 있고. 침묵이 있고. 춤이 있고. 노래가 있고. 하늘이 있고. 숲이 있고. 새가 있고. 내가 있고. 다시 네가 있고.(‘그곳에서 그곳으로’ 부분)

    “계단” “창문” “강물” “잿빛” “희망” 등의 낱말이 있는 “그곳”은 “사라진 줄 알았던 목소리가” “밤과 낮의 경계 너머로 되살아나”는 “시간 혹은 장소”이자 앞서 주체가 떠나온 ‘사이’와 같다. “집을 나간 탕자가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은 형식”(‘나선의 감각―음’)으로 존재론적 운명에 따라 다시 돌아온 “그곳”에서 삶과 죽음, 밤과 낮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 경계가 희미해지는 어느 순간, 끊임없이 ‘사이’로 돌아가야만 했던 두 번째 이유가 드러난다.

    ‘사이’로의 회귀가 존재론적 운명에 의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이유는 주체의 “잊고 있었던 상처” “결함” “과오” “우둔함”(‘유령의 몫’)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의 운명적 결함을 따라 주체는 “어떤 간격. 어떤 틈. 접힌. 닫힌. 시간 혹은 장소의. 영원과도 같은 한순간을. 펼쳐보려는. 열어보려는” 시도를 한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찰나”(‘나선의 감각―잿빛에서 잿빛까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사이’는 더없이 고요하며 적막하지만, “적막이란 적막 이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말”(‘코다의 노래’)이므로, “한 번도 듣지 못한 내면의 음을 듣”(‘나선의 감각―음’)듯이 적막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다. 그러자 적막 속에서 무언가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미 “지나간 것들”(‘검은 개’)의 “지나간 흔적”(‘거실의 모든 것’)이다. 이는 “지나간” 소리 이후에 남은 의미들로, “잊히는 말”이자 “밀려나는 말”(‘하루에 한 가지씩’)과 같다. 그런데 “흔적” 또는 “얼룩”으로 남은 말의 의미는 시적 주체를 만나 제 모습을 갖추고, 마침내 “비밀처럼 길어지는 오후의 그림자”(‘나무는 기울어진다’)로 실체화 된다.

    드러날 때까지 기다립시다. 무엇이 그 무엇이. 그 자신의 모습을. 그 자신의 그림자를. 그 자신의 침묵의 말을. 드리울 때까지. 거느릴 때까지.(‘나선의 감각―빛이 이동한다’ 부분)
    너는 이상한 얼룩을 하고 있다 좋다 아름답다 몹쓸 계시 같다 모든 불행은 돌이켜 생각하거나 앞질러 생각하는 자들의 몫이다 그림자가 사소한 방향으로 옮겨간다.(‘검버섯’ 부분)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비밀처럼 길어지는 오후의 그림자/ 나는 그것의 형상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어느 날의 얼룩.(‘나무가 기울어진다’ 부분)

    일반적으로 대상(주체)을 따라다니는 것이 그림자의 역할이지만, 이제니의 시에서 그들의 역할은 전도돼 나타난다. 사라진 “어느 날의 얼룩”, 그 “이상한 얼룩”은 ‘나’의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소리 없이 쌓인 “침묵의 말”들이 얼룩지고 늘어져 있는 형태로 이 “침묵의 말”들은 이전에 소리를 갖고 있던 말(이제는 의미만 남은 말)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결국 주체가 ‘사이’로 돌아가는 또 다른 이유는 “소리가 되기 위해 모음이 필요한 자음들처럼”(‘단 하나의 이름’) 떠돌지 않고, 온전한 제 언어의 말을 갖기 위해 “의미 이전의 소리”(‘나선의 감각―음’)가 있었던 어느 “순간”과 “찰나”를 열어보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도는 소리가 사라진 채 의미만 남은 그림자를 뒤쫓는 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그림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시적 주체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림자를 쫓는 모습은 “내 오랜 그림자의 끝을 향해 여행하기로 했다”(‘그림자 정원사’)는 주체의 말처럼, 그림자의 끝을 잡으려는 ‘꼬리잡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니의 시에서 “나선의 감각”, ‘나선’의 이미지로 여러 번 반복하여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본다라고 하자 희고 마른 뼈의 적막을 듣는다고 하자 심해의 어원을 찾아 깊이 깊이 떠돈다고 하자 물결의 적막을 적막의 불길이라고 부른다고 하자// …간신히 천천히 낮게 드리우는 그림자가 있다라고 하자 그림자를 향해 호흡하는 내가 있다라고 하자 그 곁에 당신이 있다라고 하자 회오리치는 마음이 있다라고 하자 회오리치는 눈길이 있다라고 하자 회오리치는 회한이 있다라고 하자 후회하지 않는 물결이 있다라고 하자 돌아오지 않으면서 돌아오는 기억이 있다라고 하자// …머나먼 소실점의 거리에서 우리의 깊은 숨이 서로를 불러내고 있다라고 하자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는 물결이 있다라고 하자 멀어진 만큼 멀어진 시간이 있다라고 하자 멸절된 시간만큼 돌이킬 수 없는 간절함이 있다라고 하자// … 무엇이 왜 어떻게라는 말 대신 그저 그렇게 되었다라고 하자 그저 그렇게 지금 여기에 놓여 있다라고 하자 다만 호흡하고 있다라고 하자 다만 있다라고 하자 다만 멀리서 가깝게 있다라고 하자 물결을 따라 흐르는 소용돌이를 본다라고 하자 소용돌이치며 사라지는 문장이 있다라고 하자 전해지지 않는 말을 들었다라고 하자 끝없이 이어지는 호흡이 있다라고 하자 또 다른 호흡이 또 다른 호흡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라고 하자 순간의 폭발이 있다라고 하자 다만 소리가 있다라고 하자 다만 호흡이 있다라고 하자// …끝없이 물결치는 원형이 있다라고 하자 끝없이 계속되는 숨소리가 있다라고 하자 소용돌이치며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라고 하자 다시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본다라고 하자.(‘나선의 감각―물의 호흡을 향해’ 부분)

    잊히고 지나가버린 말을 찾아 주체는 “심해의 어원을 깊이 깊이 떠돈다”. 방랑하는 ‘나’의 앞에 “보이지 않는 당신”으로 지칭되었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주체는 그림자를 향해 “호흡”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림자 또한 주체를 따라 “호흡”하며 둘 사이의 “호흡”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또 다른 호흡이 또 다른 호흡 속으로 뛰어”드는 모양새로 “소용돌이치며”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끝없이 물결치는 원형”, 나선의 형상을 만든다. 그러나 ‘나’와 그림자는 “호흡”으로만 이어져있을 뿐 정작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기에 다가갈 수 없다. 주체에게 있어 그림자란 측량기사의 닿을 수 없는 성과도 같은 것이므로 “여전히 카프카적으로 방황”(‘편지광 유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의 “호흡”과 “호흡”이 마주하는 ‘사이’에서 어느 “순간의 폭발”이 일어나고, 또 한 번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찰나”로써의 “소리”가 발생한다. 이 “소리”는 미약하게나마 “끝없이 계속되는 숨소리”로 이어지다가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선 “다시 보이지 않는 당신을 본다라고 하자”며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주체가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보고 “호흡”함으로써 “순간”의 “소리”를 뱉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목소리”(‘나선의 바람’)를 갖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일종의 “번역 투의 문장”이거나 “삭제된 문장 위로 삭제된 또 다른 문장이 내려앉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니는 이를 두고 “네 목소리 위에 내 목소리를, 내 목소리 위에 네 목소리를 덧입혀보는 일”(‘공원의 두이’)이라 언급한 바 있는데, 마치 “현재에 서서 과거의 얼굴 위로 미래의 목소리를 불러들여 덧입”(‘나선의 감각―음’)히는 것과도 같다. ‘사이’는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시간 혹은 장소”이고, 지금·여기에 서있는 주체(현재)가 그림자(과거)와의 호흡을 통해 “미래의 목소리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그림자로 인해 잠시 소환되는 것일 뿐 여전히 미래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목소리”라는 주체성을 가지기 위해, 그것을 “현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로 존재”(‘작고 검은 상자’)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은 하나다.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부터 떠나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검은 것 속의 검은 것’). “그림자로부터 떠나”간다는 것은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고, 이는 곧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꽃과 재’)라는 말과 이어진다. 결국 “우리”가 그림자를 떠난다는 건 주체의 죽음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체는 이제 “더 이상 희미해질 수 없을 만큼 희미해진다. 내부의 내부 혹은 외부의 외부로 사라진다” “세계의 그림자가 돌연 어둡게 넓어”(‘작고 흰 공’)지고, 그림자만 남아있다. 대상(주체)은 사라진 채 그림자만 남아있다. 소리를 잃은 의미만 겹겹이 남아있다. “어쩌다 우리는 소멸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을까.”(‘블랭크 하치’)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라는 말은 그림자를 남긴 주체의 유언이자 “소멸 직전의 문장”(‘고양이는 고양이를 따른다’)이다.


    3. 다시 ‘사이’, 끝의 아닌 것들의 세계

    주체는 죽음과 함께 소멸되었지만 우리는 슬프지 않을 수 있다. 그가 사라진 자리, ‘사이’의 어떤 ‘사이사이’에서 또 다시 태어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사를 반복하며 “의미 이전의 소리를 찾아 제 속의 소리길을 따라나”서는 것, “의미 너머의 어떤 본질을 발견하게 되는 것”(‘나선의 감각―음’)이 이제니의 시적 주체가 가진 “혼돈의 숙명”(‘블랭크 하치’)이라면, 이제니는 그 혼돈 속에서 주체가 내뱉는 찰나의 소리를 기록하는 자다.

    너는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건넨다. 목소리 위에 어떤 의미를 얹는다. 너만의 고유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한다. 나무가 흔들리듯이. 구름이 흐르듯이. 바람이 불어오듯이. 그러나 네 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어딘가에 먼저 가닿는 것은 네가 전하는 의미보다는 네가 내뱉은 음들 고유의 성조와 고저와 장단이다. 바로 너의 내면이다. 호흡이다. 울림이다. 감정이다. 호소이다. 너는 네 속에서 들려오는 그 모든 소리들을 기록한다. 누군가의 입을 빌려 말하듯 너는 그 무수한 목소리들을 받아 적는다. 이것이 바로 내 시다. …약간의 체념을 간직한 채 너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말하고자 하는 그것에 가닿기 위해.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관통해나가면서. 완전한 조화에 도착하기 위해. 끝없이 다가갈수록 끝없이 멀어져가는 아주 가까운 그곳을 향해.(‘나선의 감각―음’ 부분)

    이제니가 말하듯 “의미” 이전에 선행하는 것은 “너만의 고유한 목소리”이다. “의미”는 고정된 것이지만 “목소리”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네 말의 의미”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내뱉는” “목소리”와 그것의 “음”들이다. 이는 바로 너의 “내면”과도 상통하며 단일한 “의미”가 아닌 “호흡” “울림” “감정” “호소”와 같이 그 모든 것이 된다. “그 모든 소리들을 기록”하고 “그 무수한 목소리들을 받아적는” ‘너’ ‘너’는 시적 주체이자 시인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인에게 “혼돈의 숙명”이 있다면 “의미”보다 앞선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일 것인데, 이 일은 “무엇과 왜와 어떻게”라는 말보다 “그저 그렇게”(‘나선의 감각―물의 호흡을 향해’)행해지는 일이다. 이제니는 “그저 그렇게” 시를 쓴다. “말하고자 하는 그것에 가닿기 위해.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관통해나가면서. 완전한 조화에 도착하기 위해. 끝없이 다가갈수록 끝없이 멀어져가는 아주 가까운 그곳을 향해”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 밀려날 때 저 밑바닥으로부터 번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어둠으로 몰려갈 때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말한다.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으로 살아남아 오래전 그 해변을 걷고 있다. 그 옛날의 우리로서 오늘의 이 해변을 걷고 있다. …그때에도. 이미. 벌써. 여전히. 아직도.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라고 믿는 마음이 있었을 테고. 순도 높은 목소리 사이사이로 몇 줄의 음이 차례차례로 울렸을 테고. 뒤가 없는 듯한. 이미 뒤가 되어버린 듯한. 어떤 나지막한 목소리 사이사이로. 어떤 풍경이. 어떤 얼굴이. 어떤 기억이. 어떤 울음이. 점점이 들렸을 테고. 귀신에 들리듯. 바람에 날리듯. 어디에선가 어딘가로.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듣고 있다고.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 그 사이와 사이. 다시 그 사이와 사이사이의 사이. 사라지는 이 순간만이 오직 아름답다고.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로 사라질 때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가. 밤은 밤으로 다시 건너가고 있는데. 하루는 하루로 다시 기울고 있는데.(‘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 부분)

    플래시 백. 이제니는 다시 “그곳을 향해” 가는 주체의 소멸의 순간을 두 번째 시집의 마지막으로 기록한다. 지난날의 모습으로 ‘고아의 해변’을 걷는 주체가 “사이와 사이. 다시 그 사이와 사이사이의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증언한다.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또 “듣고 있다고” “사라지는 이 순간만이 오직 아름답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라는 말은 시인의 전언(傳言)이기도 하다. 다시 ‘사이’의 그 어디에선가 ‘히잉 히잉’하는 울음소리가 들릴 것이고, 또 다시 “우리의 목소리”로 돌아올 것이며, 또 다시 기록될 것이다. 이것이 결코 이제니 시의 끝은 아니다. “끝은 아니라고 믿는 마음”은 이제 우리에게도 있다. 사라지는 ‘사이’, 밤으로 또 하루로 다시 기우는 어느 ‘사이’에, “이미. 벌써. 여전히. 아직도” “저 밑바닥으로부터 번져오는 것”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소리이고, 말이고, “한 줄의 시”이며 “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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