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현장 혈흔 찾는 시약, 8년만에 개발한 공무원

    입력 : 2017.12.29 03:03

    대통령 표창 받은 임승 사무관
    지방경찰청서 개인시간 쪼개 연구… 외국산 10분의 1 값에 성능 능가
    소유권은 경찰청·국과수로 넘겨

    지난 26일 광주지방경찰청 형사과 과학수사계 임승(43) 사무관은 사무실 선반에서 박스 하나를 꺼냈다. '블러드 플레어(Blood flare)'라고 적힌 분무기 2개가 들어 있었다. 분무기 안엔 흰색 가루 소량이 담겨 있었다. "루미놀 가루를 물, 과산화수소수와 섞어 범죄 현장에 뿌리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핏자국이 푸른 형광색으로 변하죠. 이렇게 발견한 혈액 속 DNA로 용의자를 추적하고, 동선을 분석해 상황을 재구성하는 겁니다."

    26일 임승 광주지방경찰청 사무관이 과학수사계 사무실에서 시약 실험 도구를 조작하고 있다.
    26일 임승 광주지방경찰청 사무관이 과학수사계 사무실에서 시약 실험 도구를 조작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그가 8년을 매달려 개발한 혈흔 탐지 시약 '블러드 플레어'는 최근 행정안전부 주최 중앙우수제안 시상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고가 외국산 제품에 의존하던 상황에서 가격은 10분의 1 정도로 저렴하면서 발광 효과는 더 우수한 국산 제품을 개발한 공로다. 외국산 제품을 대체해 과학수사 분야 예산 절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2005년 검시 조사관 1기로 경남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에 입사한 그는 사건 사고 현장의 시체를 살펴 범죄로 인한 사망인지 판단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 일주일에 시신 두세 구씩 마주하면서 경찰이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직원들이 사용하던 액체에 주목했다. 혈흔을 찾기 위해 많게는 10~20L까지 뿌리는 액체가 프랑스·미국 등에서 L당 14만원에 가까운 고가에 수입되고 있었다. "질 좋은 국산 제품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물화학공학을 전공했고 바이오벤처 기업에서 일한 적 있거든요."

    2008년 지인 소개로 비슷한 관심을 갖고 있던 임시근 국과수 보건연구관(공동 제안자로 국무총리 표창 수상)을 만났다. 퇴근 이후나 야근 시간을 쪼개 실험을 거듭했고, 시약 샘플을 국과수로 보내면 임시근 보건연구관이 DNA 보존력 테스트를 해줬다. 2009년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범행을 밝히는 데 점퍼에 묻은 혈흔 속 피해자 유전자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을 보고 연구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

    몇 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발광도를 높이려고 화학물질을 첨가하면 DNA가 깨져버렸다. 임 사무관은 "국과수에서도 '더는 힘들지 않겠느냐'는 반응을 보여 포기할까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1년 임시근 보건연구관이 부산으로 전근 와 구체적 조언을 해주면서 DNA 보존율은 점차 높아졌다. 논문을 뒤져 실패 요인을 분석했다. 연구 시작 8년 만인 지난 2월 '시약에 접촉된 혈액 내 DNA가 일주일간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마지막 장벽을 극복했다.

    이렇게 완성된 시약은 외국산 제품만큼 형광 효과를 내면서도, 이틀에 불과했던 외국산 유통기한을 넘어서 일주일로 늘렸다. 지난 9월 500mL 용량 시제품 150개를 지방경찰청에 보급한 후 현장에서 추가 제작을 요구하고 있다. 국제 콘퍼런스에서도 외국 관계자들에게 호평받았다. "국산품이라고 억지로 쓰라고 하면 누가 쓰겠습니까. 범죄 수사 현장은 민감하기 때문에 품질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임 사무관은 시약을 개인용 상업 특허가 아닌 국유 특허로 돌렸다. 소유권은 경찰청과 국과수에 있다. 특허 출원이 진행 중이다. 그는 "수사기관과 공공기관에 저렴하게 공급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최근 광주지방경찰청으로 옮긴 그는 "인체 분비물 감식용 시약 개발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타액이나 지문 등이 있을 법한 자리를 무작위로 채취하는 현재 수사 방식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참고할 만한 논문이나 기존 제품도 없으니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 되겠지만, 계속 도전해 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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