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다듬잇돌… 직접 짠 나무 캔버스에 추억 새기다

    입력 : 2017.12.28 04:13

    임충섭 '단색적 사고' 展

    캔버스를 채소 모양으로 만든 '채식주의자 l,ll,lll'.
    캔버스를 채소 모양으로 만든 '채식주의자 l,ll,lll'. /현대화랑
    연초록 동글납작한 목판 셋이 나란히 걸렸다. 무인 듯, 가지인 듯 보이는 이 작품 제목은 '채식주의자'. 두루마기 소매를 뚝 잘라놓은 듯한 베이지색 목판도 재미있다. '자락'. 재미화가 임충섭(76) 작품이다.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임충섭이 1월 7일까지 서울 삼청로 현대화랑에서 '단색적 사고'전을 연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달, 그리고 월인천지'를 주제로 펼친 대규모 회고전 이후 5년 만에 모국에서 갖는 개인전이다. 단색화 맥락이되 평면과 입체를 혼용한 작업이라 '단색적'이란 수식을 붙였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술 교사를 하다 뉴욕으로 간 1970년대 후반 이후 최근에 이르는 작품 30여 점이다. 배추, 서랍, 분청, 처마 등을 형상화한 목판 작업들로 백색이거나 단색이다. 제목들이 시적(詩的)이다. '굼치' '뒤로 걷기' '너의 소리를 듣는 나무'…. 평론가 오광수는 "임충섭은 우리를 풍화된 기억들의 뒤안길로 안내한다. 다듬잇돌처럼 생긴 작품은 저 멀리서 들리는 다듬이질을 불러온다"고 했다.

    서울이 답답해 뉴욕으로 떠났고, 사각형 캔버스가 감옥처럼 느껴져 "다빈치도 피카소도 시도한 적 없는" 다양한 사물 모양 캔버스를 고안했다. 거기에 한지나 면사를 붙인 뒤 물감을 덧칠한다. 표면은 텅 비었다. 동양화 '여백'의 정신성을 서양 예술에 접목한 결과. 이 미니멀한 작품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고향 진천에서의 추억, 학비를 벌기 위해 접시닦이, 부두 노동까지 안 해본 일 없는 거대도시 뉴욕의 삶이 버무려 있다.

    뉴욕에서 김환기를 만난 일화가 재미있다. "뉴욕엔 왜 왔느냐 물어서 '밖에서 안을 보고 싶어서요' 했더니 "참 잘했네' 하셨지요. 근데 '학위도 따볼까 합니다" 덧붙이니 '요새 청년들은 학위에 목을 맨다'며 돌아앉으시더군요."

    전시엔 뉴욕 생활 초기 제작한 회화들도 나왔다. "팝아트 유행하던 뉴욕에서 번민하며 실험한 작품들"이다. 임충섭이 햄버거 얘기를 했다. "내가 미국에서 먹은 햄버거만 4만 개예요. 그래도 미국 사람이 될 수 없더라고요. 된장 냄새가 숙명일 바에야 나를 자꾸 파고들고 찾으면 내 것이 나온다고 믿게 됐지요."

    (02)2287-3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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