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예쁜 글씨는 보톡스 맞은 여인같아 싫어"

    입력 : 2017.12.23 03:01

    喜壽 맞아 전시, 서예가 권창륜… 일중·여초에게 배운 수제자
    "서예는 心畫… 아이들이 배워야"

    "일중(一中) 선생은 완만한 성격처럼 글씨도 우아했어요. 여초(如初) 선생은 불 같은 성정처럼 글씨도 괴팍하고 날카로웠지요. 한집안 형제도 글씨는 그렇듯 달랐어요."

    한국 현대 서예의 거장 혹은 국필(國筆)로 불리는 일중 김충현(1921~2006)과 여초 김응현(1927~2007)의 글씨를 두고 초정 권창륜(77)이 말했다. 현행 대한민국 국새에 새긴 글씨의 주역이기도 한 그는 스무 살에 일중·여초 형제가 이끌던 '동방연서회'에 들어가 두 명필의 가르침을 동시에 받은 수제자다. 그래서일까. 희수(喜壽)를 기념해 1월 10일까지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열리는 '권창륜 희수서전(喜壽書展)'은 스승의 풍격을 잇되 흉내에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필법을 창안한 제자가 60년 연마한 서예 역정을 보여주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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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수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22일 만난 권창륜 선생은“칼 쓰는 법을 정확히 알아야 명장이 되듯 붓을 잡고 움직이는 용필법을 제대로 배워야 명필이 된다”고 했다. 뒤로 보이는 작품이 백두산 천문봉에서 쓴 '황고(荒古)'다. /이태경 기자
    42점 대작들이 걸린 전시장은 말 그대로 '붓의 향연'이다. 붓이 날고 먹물이 튀는 초서를 비롯해 능청스러운 예서, 바람처럼 날렵한 행서에 이르기까지 문외한의 눈마저 즐겁게 한다. 160㎝ 단신에 흰 수염을 기른 권창륜 선생은 "그냥 휘둘러본 먹의 흔적일 뿐 낙서(樂書)여야 할 글씨가 낙서(落書)가 된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며 웃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그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익히며 붓글씨를 배웠다. "분판이라고, 옻칠한 나무판에 글씨를 쓴 뒤 물걸레로 지우고 다시 쓰고 했지요." 중앙대 국문과에 입학하며 서울로 왔을 때도 붓을 놓지 않았다. "신문에서 일중·여초 선생이 운영하는 동방연서회에서 겨울방학 서화 특별 강습을 한다는 소식을 보고 지체 없이 달려갔습니다. 시골에선 족제비털 2~3㎝를 겨우 모은 작은 붓으로 깔짝깔짝 쓰던 글씨를 서울에선 한 뼘도 넘는 굵기의 양털 붓으로 팔을 크게 휘둘러가면서 쓰니 마치 권투를 하는 듯했답니다."

    197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통령상 없는 국무총리상으로 최고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중국 북위 시대 서체로 둥글둥글하면서도 시원하게 뻗어내리는 '석문명체(石門銘體)'로 인정받았다. 20대엔 '개성이 없으면 예술은 죽은 것'이라 믿어 스승들 가르침에서 벗어나 괴상한 글씨체를 고집해 혼쭐도 여러 번 났다.

    이번 전시엔 무수한 일탈과 시행착오를 거쳐 탄생한 권창륜 서체의 진수들이 모였다. "너무 예쁘고 단정한 글씨는 보톡스 맞고 화장한 여인 같아 싫다"는 그가 "거칠어도 기상이 넘치게 쓰려 노력한" 글씨들이다.

    거칠고 예스럽다는 뜻의 '황고(荒古)'는 2007년 백두산 천문봉에 올라 그 자리에서 쓴 작품이다. 한라산에 오르다 장군봉 바라보며 두루마리 명주천에 '장군처럼' 휘갈겨 쓴 글씨도 거침없다. "대자연 속에 들어가면 호연지기가 내 안에 들어와 글씨에도 기운이 담겨요. 방 안에서 쓰는 글씨와는 천양지차로 다르지요." 술 취해 쓴 취필(醉筆) '추수위신(秋水爲神)'도 재미있다. "이태백이 '시는 칼같이 냉혹하나 칼집은 술'이라는 말을 했어요. 고주망태가 되어선 안 되나 적당한 취기가 있으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요."

    권창륜 글씨는 운현궁 현판을 비롯해 청와대 춘추문과 연수문, 남산한옥마을과 삼청각 등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숭례문 상량문에도 참여했다. 그는 "요즘 우리 사회 곳곳에서 터지는 불행은 기본을 터득하지 않은 데서 온 것"이라고 했다. "서예를 심화(心畵) 즉, 마음의 그림이라 부릅니다. 우리 아이들이 서예와 한문을 어릴 때부터 익히면 인성 교육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02)734-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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