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의 세상읽기] '적폐청산' 그 정도 했으면 됐다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입력 : 2017.12.23 03:05

    건국 후 150년간 활력 있던 朝鮮
    네 차례 士禍로 보복 되풀이하다 인재 '씨' 마르고 왜란·호란 당해
    지금 戰亂 맞기 전 조선과 비슷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건국 직후부터 약 150년 동안 조선(朝鮮)의 국력은 상당했다. 과학기술과 문화의 수준이 세계적이었고 군사력도 강했다. '4군-6진 개척'이란 짧은 단어 속에는 소풍 가듯 만주(滿洲)를 넘나들던 수백 차례에 걸친 여진족 정벌의 역사가 숨어 있다. 이렇게 활력 있던 조선을 거덜 낸 것이 4대 사화(士禍)였다. 사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간신(奸臣)들이 과거 잘못을 바로잡는다며 평지풍파를 일으킬 '죄(罪)'를 만들어낸다. 둘째 이런 측근을 제어해야 할 군주가 오히려 그들에게 휘둘린다. 셋째 보복을 당한 쪽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처지가 바뀌면 꼭 앙갚음했다. 사화를 정치세력 간 경쟁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화의 본질은 강자의 약자에 대한 '정치 보복'이었던 것이다.

    무오사화(1498년)부터 마지막 을사사화(1545년)까지의 47년간 인재의 '씨'가 말랐다. 죽고 죽이는 복수(復讐)의 무한궤도를 돌며 안에서 어수선해진 나라의 명줄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이 끊었다. 내부가 단결된 나라가 외침을 당한 경우는 별로 없다. 역사는 '나라 망치는 첩경은 끝없는 정치 보복으로 내부 뒤흔들기'라는 교훈을 던진다.

    그 결정적 증거가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청(淸)의 요구대로 '대청 황제'라고 불러줬으면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정권을 쥔 척화파의 반대에 왕이 꼼짝하지 못했다.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낸 세력 덕에 왕이 됐기 때문이다. 척화, 즉 오랑캐를 배척하는 세력은 전쟁 준비를 착실히 해야 옳다. 그런데 그들은 입으로만 척화를 했다.

    대사간 윤황(尹煌)이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간언하면 그 부하들이 "전쟁을 하면 국가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윤황이 또다시 "강화도의 무기와 식량을 평양으로 보내 적을 막자"고 하면 전쟁 최고 결정 기구인 비변사가 "그렇게 하는 게 맞기는 한데 민력(民力)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억지로 시키면 내란이 우려된다"고 반대했다.

    전쟁이 싫으면 전쟁의 원인을 없애면 될 일이고,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결연히 전쟁 준비를 하는 게 마땅한데도 당시 정권을 쥔 세력은 그 반대로만 했다.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정상적인 나라였다면 이럴 때 '바른말'이 나와야 하는데 사화로 도륙이 난 선비 중에 감히 직언할 수 있는 인물은 극소수였다.

    정권이 바뀌고 7개월 동안 국민들은 전(前) 정권과 전전(前前)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재판받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하도 많이 봐 이제는 일상처럼 느껴진다. 공직자뿐 아니라 이런저런 기업인들도 굴비 엮이듯 검찰로, 법정으로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갑질 프레임'에 얽혀 성난 민심의 돌팔매를 맞을까 우려해 제대로 변명도 못 하고 있다.

    이 살벌한 풍경에 평소 같으면 바른말을 해야 할 사람들도 잔뜩 움츠린 채 입을 다물고 있다. 사실인지 루머인지 알 수 없으나 시중에는 "다음은 누구 차례" "누가 내사를 받는다더라" "누구는 기밀문서를 숨기느라 바쁘다더라"는 이야기가 확산되고 있다. 할 말 제대로 못 하고 정체 모를 '공포'에 떠는 것 자체가 우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더욱이 나라 밖에서는 북핵으로 인해 전쟁 이야기까지 들리고 미국과 중국과 일본은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힘으로 눌릴 뿐 아니라 평소 겪지 않던 멸시까지 당하고 있다. 아무리 비교하고 싶지 않아도 현재 우리가 겪는 상황이 병자호란을 맞기 직전의 조선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이 정도 했으면 어느 정도 적폐가 청산됐다고 본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나라는 옷감이 아니다. 표백제를 아무리 써도 티 없는 백색(白色)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국민도 냉정을 되찾아야겠다. 잘못을 고치는 것은 좋지만 우리 자손들이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이라는 그릇 자체가 금 가도록 만들 수는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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