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미국 NBC 인터뷰에서 키리졸브 등 한·미 훈련을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로 연기하는 방안을 미국에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20일(한국 시각) "연합 훈련 중단 계획을 모른다"고 했다. 한·미 갈등으로 해석될 조짐이 보이자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한·미 군사 당국 간 상당한 이야기가 있었다"고 했다. 이어 한미연합사가 "우리는 동맹의 결정을 따를 것"이라며 논의 사실을 인정하면서 '갈등설'은 일단 가라앉았다.

연합 훈련 연기는 실무자들 사이에서 이미 상당 기간 논의가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이 이 시점에 이를 공개적으로 다시 꺼낸 것은 한·미 훈련 연기를 활용해 대외적으로 한반도 주변 상황이 평화 국면으로 가는 모양새를 만들어 보자는 구상인 것으로 보인다. 모양을 먼저 만들고 북한과 미국 등이 거기에 맞춰 움직이도록 끌고 가보자는 것이다. 또 한국이 평화 국면 전환을 주도했다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주는 효과도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한·미 훈련을 '거래' 대상으로 만든 전례를 남겼으며 한·미 동맹에 대한 미국 내 여론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미 연합 키리졸브(KR)·독수리(FE) 훈련은 매년 2월 말~3월 초에 시작돼 50~60일간 이어진다. 내년 훈련이 예년처럼 진행될 경우 평창 동계올림픽(2월 9~25일)과는 겹치지 않지만 패럴림픽(3월 9~18일)과는 겹친다. 정부는 수개월 전 미측에 훈련 연기를 제안한 것으로 20일 알려졌다. 미측은 처음엔 난색을 보였다고 한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은 한국 외 다른 태평양 국가들과도 훈련 일정이 가득 차 있다"며 "하나를 조정하면 나머지 일정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 변경이 쉽지 않다고 했다"고 전했다. 또 정부는 한·미 훈련 연기와 관련된 보도가 지난달 23일 나왔을 때 "정부 내에서 논의한 바 없다"고 했다.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지난 14일에도 '한·미 간에 (훈련 연기에 관한) 논의는 하느냐'는 질문에 "논의는 없었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이런 협의 과정을 숨겼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온두라스, 나이지리아 등 6국 주한 대사 신임장 제정식을 갖기 위해 청와대 접견실로 입장하고 있다. 문 대통령 왼쪽은 강경화 외교부장관.

이 때문에 한·미 간에 훈련 연기를 놓고 불협화음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이미 미국 측에 제안을 했고, 미국 측에서도 지금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틸러슨 국무장관은 문 대통령 인터뷰가 방송된 뒤 캐나다 방문 중 가진 기자회견에서 "동계올림픽에 앞서 한·일과 군사훈련을 중단하려는 어떤 계획도 알지 못한다"며 "이 훈련들은 수년간 계속돼왔고, 예정된 일정에 따라 수행된다"고 했다. 틸러슨 장관의 '모른다(not aware)'는 표현이 불쾌감의 표시인지, 정말로 본인은 모르고 있다는 것인지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최소한 미국 최고 지도부에서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훈련 연기는 국방 관련 사안이고, (외교를 담당하는) 틸러슨 장관은 직접 라인도 아니다"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훈련 연기 요청 사실을 이 시기에 미국 방송 인터뷰란 형식으로 공개한 배경을 두고도 여러 말이 나오고 있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면 실무 선에선 이미 어느 정도 의견 접근이 이뤄진 것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실무자들은 "사실상 합의가 돼 있으며 공식 발표만 남았다"고 해왔다. 우리 정부의 강력한 연기 요구에 미측은 키리졸브 훈련은 내년 4월 23일부터 5월 3일까지 열기로 하고, 실제 병력이 야외 기동훈련을 하는 독수리 훈련도 함께 연기했다는 사실도 보도가 됐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미국 TV 인터뷰를 통해 '논의가 상당히 돼있다'고 하지 않고 "미국 측에 제안했다"고만 했다. 현재 상황이나 한국 대통령의 공개 요청이란 점까지 감안하면 미국 측으로선 'NO'라고 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조만간 미국이 공식적으로 호응할 경우 대외적으로는 '문 대통령 연기 요청 → 미국 동의 → 평화 올림픽 분위기 조성 → 북한 참가와 대화 재개 기대' 순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정부가 논란 속에서도 훈련 연기 카드를 꺼낸 이유는 우선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제기되는 '북한 리스크'를 막아보자는 것이다. 한·미 훈련을 중단해 북한의 도발 명분을 미리 막아보자는 취지다. 정부 바람대로 가게 된다면 미·북 사이에 일정 부분 대화의 모멘텀이 될 수 있다. 정부는 "북핵 문제는 미·북 문제"라며 미·북 대화를 강조해왔다. 이럴 경우 정부로선 북한 문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효과를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다. 사실상 '폐기'됐던 '운전석론'이 다시 힘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문제는 북한이 이에 응하지 않거나, 거꾸로 추가 도발을 할 경우다. 전문가들은 "한·미가 정례 훈련까지 연기했는데 북한이 무시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며 "특히 북한이 도발까지 한다면 미국이 '3개월 시한'이라고 해왔던 것과 맞물리며 평창올림픽을 전후해 한반도 위기가 급격히 고조될 수 있다"고 했다. 또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이번 훈련 연기 요청은 두고두고 부담이 될 수 있다. 북한 도발을 막기 위해 한·미가 연례적으로 해온 방어 훈련을 양보했다는 나쁜 전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중국·러시아의 쌍중단(雙中斷) 요구가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했고, 안보 전문가들은 "미국은 한국을 믿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 전직 장성은 "이번 고비를 넘기더라도 이제 북한은 수시로 '훈련 연기하라. 전에도 하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라며 "지금까지 '방어 훈련'을 연기할 이유가 없다고 했던 미국으로선 '이제 한국이 알아서 하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청와대는 이날 북한의 핵 도발과 한·미 훈련을 동일 선상에 놓고 그 둘의 동시 중단을 요구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쌍중단'과 이번 연기 조치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도 청와대 참모들에게 "연합 훈련을 연기하는 문제는 결국 북한에 달려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추가 도발할 경우 훈련 연기 검토는 다시 백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