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3] 일본이 만든 단어 '췌장'

  •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입력 : 2017.12.08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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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영화의 제목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스미노 요루(住野よる)라는 일본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데, 그로테스크한 제목과 달리 내용은 젊은 남녀의 성장 스토리를 담은 청춘물이라 한다. 많은 한국인이 췌장 하면 췌장암을 떠올린다. 췌장암은 생존율이 아주 낮은 위험한 암으로 알려져 있다.

    췌장의 췌는 한자로 '膵'라고 쓴다. 19세기 초, 일본의 난의학(네덜란드의학) 학자인 우타가와 겐신(宇田川玄眞)이 새로 만든 한자이다. 중국 전통의학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기(臟器)이기에 그에 해당하는 문자가 없었다. 서양 의학에서 췌장은 pancreas라고 하는데, pan(모든·entire)에다 creas(육신·flesh)를 더한 게 어원이다. 서양 해부학 서적 번역에 고심하던 겐신은 원어의 어원으로부터 육달월(月) 변에 모일 췌(萃)를 더해 膵 자를 조자(造字)하고, pancreas를 췌장으로 번역했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만든 한자를 화제한자(和製漢字)라고 한다. 의학 용어 중에서는 분비선, 갑상선 등에 쓰이는 '腺'도 화제한자이다. 신체 기능에 필수적인 호르몬이나 화학물질을 생성하는 조직 또는 기관인 gland의 번역어다. 腺도 겐신이 만든 한자이다. 육달월 변에 샘 천(泉)을 더하니 '몸에서 샘솟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번에는 어원이 아니라 기능에 착안한 조자라는 점이 신통방통하다.

    일본은 이처럼 근대화 시기 이전에 기존 지식 체계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기존 한자를 조합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 서구의 개념과 지식을 받아들이고 내재화하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현재 '腺' 자와 '膵' 자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중국 자전에 기본자로 수록돼 있다. 한자의 오리지널 중국도 한 수 배우는 일본 근세 지적 역동성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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