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편지] 긴 세월 10남매 버팀목, 원양 선장 셋째 오빠

  • 이은미 수필가

    입력 : 2017.12.08 03:11

    이은미 수필가
    이은미 수필가

    어린 시절, 우리 집엔 일찌감치 안방을 차지한, 다리가 넷 달린 커다란 브라운관 흑백텔레비전이 있었다. 난 그 속에서 나오는 온갖 영상에 정신을 쏙 빼놓았다. 연속극 '여로'는 어른들이, '타잔'은 나 같은 아이들이 재미있게 보았다.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이 농사일을 끝내고 삼삼오오 우리 집으로 왔다. 그 텔레비전을 보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우리 집은 마을의 안방극장이었다.

    그리고 집에는 커다란 고무보트도 있었다. 햇살이 반짝이는 날, 냇가에 가져가면 물장구와 물보라는 잦아들고 보트 타는 아이들의 환호가 미루나무 속 매미 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내게는 하얀 해군 제복을 입고 가끔 집에 오는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우리 10남매 중 셋째로, 막내인 나와는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난다. 어린 나의 눈에 오빠는 늘 멋있었고 미남이었으며 씩씩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내가 꼬마일 때, 오빠는 베트남전(1964~1973)에 해군으로 파병되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일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집에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엄마가 그들에게 두 손 모아 빌며 무언가를 간절히 애원했다. 마침 휴가를 왔던 오빠가 나서서 그들과 한참을 얘기했고, 그들은 돌아갔다. 집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후에야 알았다. 아버지가 사업하다가 빚을 지어 집이 넘어갈 지경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문제를 오빠가 대신 해결하기로 하였다는 것을.

    /조선일보 DB
    그 후 항공우편이 내 앞으로 자주 왔다. 빨강과 파랑 빗금으로 테두리가 그려진 봉투 속에는 오빠의 긴 글이 있었다. 내가 그려볼 수 없는 여러 외국 이야기와 선상 생활,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면 비행기 태워주겠다는 꿈같은 약속까지. 그때부터 나의 공부와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오빠의 안부를 물으며 고향과 가족 소식을 자세히 전했다.

    훗날 컴퓨터가 나온 뒤로는 이메일을 보냈다. 처음엔 영작이 어려워 한글로 회신했는데 "글자가 깨져 괴상한 문자가 왔다"는 오빠의 국제전화를 받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에 이어 직장인이 되어서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아마도 오빠는 나와의 편지를 통해 망망대해의 외로움을 달래고 용기를 내었던 것 같다.

    헤드셋을 쓰고 영어를 공부하던 오빠는 베트남전 파병과 해군 경험을 살려 수출품을 실어 나르는 무역선의 일등 항해사와 선장이 되어 세계를 누볐다. 아버지 빚을 갚기 위해서였을까, 연로한 부모님과 형님들, 그리고 여러 동생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을까, 결혼해서도 처자식을 고국에 둔 채 은퇴할 때까지 바다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생전에 늘 말씀하셨다. "네 셋째 오빠가 많은 고생을 해서 우리 집을 구했다"고. 그러시며 오빠를 위해 늘 기도하셨는데 돌아가실 때는 그렇게 보고파 하셨건만 오빠 모습도 보지 못했다.

    이제 오빠도 나이가 일흔 중반. 여러 해 전에 은퇴해 국가유공자로 노후를 지낸다. 가끔 "나라가 잘 살고 동생들 잘되었으니 그게 내 보람"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에는 베트남전 때 아팠던 다리에 다시 통증이 와서 병원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손주 보고 가족과 평안하게 사신다. 그런데 칠순을 넘어 쇠약해 가는 모습을 보면 문득 왜 슬퍼지는지, 눈물이 글썽거리다 방울져 떨어진다. 그건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오빠의 깊은 사랑과, 그 사랑이 여러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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