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전, 한센인 온기 못잊어… 치아 진료 계속했죠

    입력 : 2017.12.06 04:35

    유동수 한국구라봉사회 회장
    서울대 치대 동문 160명 참여… 3만명 진료·틀니 4600개 제작

    1969년 여름 전남 소록도에서 당시 37세였던 유동수〈작은 사진〉 서울대 치대 교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센병에 대해 공부했는데도 첫 환자를 대하고는 충격에 빠졌다. 진료받으러 온 한센인은 성치 않은 얼굴로 눈물만 흘렸다. 후배 의사와 학생들은 유 교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교환교수로 일본에 갔던 그는 "소록도에 치과 진료 봉사 갔다가 무척 고생했다"는 일본 의료진 얘기를 들었다. 지기 싫은 마음에 "이제부턴 한국 의사들이 가겠다"고 약속하고는 서울대 교수·학생 7명을 모아 소록도로 향했다. "어쩔 수 없이 눈 질끈 감고 환자 입속에 손을 넣었죠. 그 순간, 온기가 느껴졌어요. 살아있구나. 이 사람에게도 생명이 있다. 반드시 고쳐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돌아보면 의사로서 정말 창피한 얘기"라고 했다.

    48년을 이어온 한국구라(救癩)봉사회의 시작이었다. 학내 서클로 출발해 1982년 사단법인이 됐고, 지도교수였던 유 교수는 85세의 명예교수가 돼 회장으로서 여전히 봉사회를 이끈다. 서울대 치대 출신 회원 160명이 수십만원씩 회비를 내고 진료 봉사한다. 요양시설·정착촌을 찾아다니며 진료한 공로로 한국구라봉사회는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수여하는 아산상 의료봉사상을 받았다.

    유동수 서울대 치대 명예교수가 지난 7월 나주 호혜원에서 한센병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유동수 서울대 치대 명예교수가 지난 7월 나주 호혜원에서 한센병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한국구라봉사회
    구라봉사회는 한센인 3만4000여 명을 진료했고 4600개 넘는 틀니를 만들어줬다. 매년 지역을 정해 봄에 두 차례 가서 구강 모형을 제작하고, 여름에 일주일 이상 머물며 틀니를 완성하고, 이후 두 번 점검한다. 주말엔 인근 복지시설로 봉사 다닌다.

    유 교수는 "한센인에게 구강 치료는 생명과 같다"고 했다. "한센병은 잘 먹고 영양 상태가 좋아야 낫습니다. 그런데 한센인은 손가락이 불편해 칫솔질을 못해요. 치과에서 진료도 안 해주니 환자들끼리 서로 상한 이를 뽑아주며 버텼죠. 우리가 아니면 치료할 사람이 없었어요."

    한센인이 많았던 1970년대엔 요청이 밀려들었다. 기부금을 받기 전까진 유 교수와 회원들이 호주머니 털고 빚을 냈다. 유 교수의 아내 김성희(80)씨는 "450만원짜리 전세 살던 시절 1년에 500만원을 봉사에 쏟아붓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며 "큰맘 먹고 가본 소록도에서 의사들이 고생하는 걸 보고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반세기 동안 한센인 수는 크게 줄었다. "정착촌에 가면 '소록도에서 선생님이 만들어줬던 틀니 고쳐달라'는 환자를 만나요. 지하철에서도 한센인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해요. '그때 치료하지 않았다면 이 환자들이 지금까지 살아있을까' 가슴이 뜨끔하죠. 도저히 손 뗄 수 없었어요."

    지금도 매년 첫 환자 틀니 장착은 유 교수가 맡는다. 그는 "국내 한센인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계속하고, 이후엔 동남아 환자를 찾아가고 싶다"고 했다. 함남 북청에서 17세에 월남해 목사를 꿈꿨다는 그는 아버지 뜻을 꺾지 못해 치과의사가 됐다. 가난하고 아픈 이웃 돌보는 목사의 꿈을 의사가 돼 이룬 것이냐고 묻자 그는 "평범한 사람 영웅 만들지 말라"며 손사래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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