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마흔 다 돼 대패 든 '소목장'… "나이들수록 버리는 게 벼리는 것"

    입력 : 2017.12.02 03:01

    예술의전당서 첫 개인전 여는 늦깎이 목수 양석중씨

    운동권, 대기업에 특채되다
    1995년까지 노동운동하다가 소련 붕괴되자 그만둬
    선배 학원서 수학 가르치다 '운동권 특채'로 대우車 입사

    2001년 희망퇴직 후 목수 시작
    친구가 한옥펜션 사업하자 일당 4만원 서까래 끌질 배워
    문짝 짜다 가구로 방향 틀어 스승 만나면서 솜씨 늘어

    톱·대패 잡은 지 12년 만에…
    2013년 소목장 이수자 됐고 그해 공예대전 대통령상 받아

    항상 줄자 대던 '먹물 목수'
    30대 초반까지 남 위해 일해… 지금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생활도 되고 남에게도 도움

    젊을 땐 능력 붙이려 애썼지만… 이제는 잘 버려야 날이 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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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석중씨는 목수로 전업하고 나서 손이 두툼해졌다. 전통 가구의 비례에 대해 그는 “키와 폭, 면 분할 등은 직감으로 정하고, 망설여질 땐 계산해본다”며 “정사각형이 아니라면 3대4나 3대5, 4대5로 짤 때 안정적”이라고 했다. / 강화=오종찬 기자
    작업대 뒤에 걸린 공구 수백 개가 시야를 압도했다. 톱, 끌, 대패, 망치…. 많아도 질서가 있었다. 양석중(53) 소목장(小木匠)은 "솜씨 없는 놈이 연장 욕심만 많다"며 웃었다. 소목장이란 가구나 문을 짜는 사람이다. 목공방엔 건조돼 쓰임을 기다리는 목재들, 일하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나무 무더기, 수북이 쌓인 대팻밥도 보였다.

    양석중씨는 운동권 출신 늦깎이 목수다. 201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박명배씨의 이수자가 됐고 그해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톱과 대패를 잡은 지 12년 만의 쾌거였다. 오는 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그는 도록(圖錄)에 이렇게 썼다. "짧아도 40년, 길면 400~500년 이 땅에 뿌리내리고 서 있던 나무가 내 앞에 목재라는 이름으로 누워 있다. 새 생명을 불어넣어 가구라는 이름으로 더 오래 살게 하고 싶다." 지난달 21일 강화도 와우(蝸牛·달팽이)목공방으로 차를 몰았다.

    노동운동하다 '대기업 특채'

    서울대 인류학과 83학번 양석중은 대학 입학 1주일 만에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3학년 때는 4·19 기념제를 앞두고 구로공단에서 시위 동참 격문을 돌리다가 붙잡혔다. 27일간 구금되는 바람에 중간고사를 못 치렀고 학사 경고 누적으로 제적됐다. 노태우 대통령 당선으로 복학길이 열려 학교로 돌아왔지만 다시 인천 공단으로 들어가 야학을 열었다.

    ―1989년에 만든 '노동자 대학'이지요?

    "초등학교나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직한 노동자들 중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검정고시 준비할 수 있게 도왔지요. 그런데 기부금품 모집에 관한 법률 위반, 옥외광고물 게시법 위반 등 온갖 죄명을 붙여서 경찰이 못살게 굴었어요. 대학 강의실을 빌려 가르치고 도망 다니고 그랬죠. 결혼도 수배 상태에서 가명(假名)으로 했어요(웃음)."

    ―언제까지 노동운동을 했나요.

    "1995년 초에 그만뒀어요. 마르크시즘을 들여다보고 가르치면서 '자본주의보다 더 인간적이다' 생각했는데, 소련 연방이 무너지고 개방정책을 펴는 겁니다. 충격을 받았고 멍해졌죠. 학생 모집도 잘 안돼 해산을 결정했어요."

    ―막막했겠군요.

    "'사교육이나 해댄다'고 제가 막 욕했던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가 하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어요. 그러다 '운동권 특채'로 대우자동차 차체부 관리직원이 됐습니다. 생산직 노조가 이미 있었는데 사측과 마찰이 잦았어요. 저 같은 운동권 출신 30여 명이 모여 회사의 문제점을 문서로 정리해 김우중 회장에게 올렸지요."

    ―그랬더니요?

    "제 책상을 없애버리고 노사관리부서로 발령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갔는데 노조위원장은 '자본의 나팔수'라며 저를 비난했지요. 자동차는 안 팔리는데 투자는 계속하며 부채가 쌓이고 있었어요. 금방 망할 것 같았습니다. 윤석철 서울대 경영대 교수를 초청해 강연을 들었는데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하시더군요."

    ―어떤 해법을 주셨나요?

    "겨울이 되면 나무는 몸통과 뿌리를 보존해야 해 낙엽을 떨군다며 자본주의를 나무에 빗댄 분입니다. 저희는 '기업이 생존하려고 근로자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며 공존과 경쟁에 대해 물었지요. 그 양반 답을 여태 안 잊어먹어요. '공존은 인간의 법칙이고 경쟁은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법칙을 따라야 한다.' 공존이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나무 '속'을 들여다보는 안목
    마흔 다 돼 대패 든 '소목장'…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삼층장’. 비례미와 짜임이 섬세하고, 미닫이 속 문짝에 수를 놓았다. / 양석중 제공
    양씨는 2001년 1월 희망퇴직으로 실업자가 됐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데 폭설로 아파트 주차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주차돼 있던 차가 빠져나가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주민들끼리 다퉜다. '저렇게 경쟁만 하고 사는 건가?' 낙심하며 마지막 실험을 했단다. 망치와 드라이버로 주차장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어떤 실험이었나요?

    "이런 생각이었어요. '내가 얼음을 깨는데 주민들이 보고 동참하면 희망이 있고 아니면 정말 나만 생각하며 살 거야.' 비장했지요. 이튿날 사람들이 나왔어요. 희망까지는 아니지만 절망하진 말아야겠다 싶었죠."

    ―그런데 갑자기 목수가 됐네요.

    "사람이 보기 싫더라고요. 그럼 돌일까, 흙일까, 나무일까. 나무 촉감이 좋았어요. 친구가 강화도에 한옥 펜션을 짓는다길래 취업을 부탁했죠. 일당 4만원 받고 서까래 깎고 끌질부터 시작했어요."

    ―낯선 일인데 두렵지 않았나요?

    "작업할 땐 옆에서 전화벨이 울려도 못 들을 만큼 몰두했어요. 흥미가 있는 건 분명했죠. '소질도 있느냐' 하는 질문엔 물음표였습니다. 막막해서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까지 찾아뵈었어요."

    ―기억하시던가요.

    "다행히도요. 제가 뭘 잘했는지, 앞으로 뭘 잘하겠는지 여쭈었습니다. 군인이나 문학가가 될 줄 알았다며 '너는 정말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 하셨지요. 뾰족한 수는 못 찾았지만 격려가 됐습니다."

    ―목수로 실력이 곧 붙던가요?

    "처음엔 하루 일하면 이틀 쉬어야 할 만큼 힘들었죠. 서까래와 달리 지붕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문짝을 짜다가 가구로 방향을 틀었지요. 스승을 만나면서 솜씨가 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책임지는 이 일이 수공업의 매력인가요?

    "매력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죠. 칠만 남에게 의뢰해도 배보다 배꼽이 커져요. 좋은 목재 구하는 것도 힘들고요. 검고 아름다운 먹이 든 감나무를 먹감나무라 불러요. 오래되거나 상처가 나서 까맣게 된 거죠. 그런데 먹이 들어 있는지는 잘라봐야 알 수 있습니다. 스무 그루 베면 하나쯤 나와요."

    ―어떤 나무를 많이 쓰나요.

    "느티나무와 오동나무요. 참죽나무, 돌배나무, 은행나무도 씁니다. 느티나무는 200년쯤 돼야 목질이 좋은데 그런 건 대부분 보호수예요. 고목(古木)이 태풍에 쓰러졌다는 소식 들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갔지요."

    ―이제 나무 보는 안목도 생겼겠네요.

    "그게 핵심 경쟁력이에요. 나무가 가진 멋을 자연스럽게 가구에 담으려고 합니다."

    ―예민한 도공(陶工)은 도자기 100개 구우면 99개는 깨버린다는데 소목장은 어떤가요?

    "우리는 고르는 과정에서 그게 일어나죠. (난로에 나무를 넣으며) 이렇게 땔감으로 씁니다. 목재를 보면 이건 갈라지게 생겼어요. 문제가 있으니 가구에 쓰면 결국 탈이 납니다. 버리는 게 맞더라고요. 휘어진 목재는 억지로 펴도 다시 휘어요."

    "잘 버려야 날이 선다"

    한 나무도 동서남북에 따라 목질이 다르다. 북쪽은 추위를 견뎌 나이테가 촘촘하고 강도가 높다. 남쪽은 무르다. 같은 느티나무라도 물가에서는 빨리 성장한 대신 푸석푸석하다. 자갈밭에서 자란 놈은 나이테를 따라 균열이 있다. 그는 "나무를 켤 때는 방향에 따라 무늬가 달라지기 때문에 신중해진다"고 했다.

    ―후회할 때도 있겠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켰더라면 더 나았을지 아닐지는 모르죠. '가지 않은 길'일 텐데,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해요(웃음)."

    ―처음부터 목수로 잔뼈가 굵은 분들과 차이가 있는지요.

    "저는 '먹물' 티가 납니다. 91㎝ 길이 판재를 삼등분하라고 하면 저는 계산기부터 두드리는데 남들은 접근법이 달라요. 대충 30㎝쯤 되겠네, 하면서 금을 긋죠. 정밀한 자도 없는 주제에 계산부터 한다고 혼이 납니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뭔 줄 아세요? '재보지 말고 대봐!' 더 즉물적이고 실전적이죠."

    ―개인전 제목이 '미래의 전통'인데.

    "집과 옷이 변했으니 가구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았어요. 가능하면 많은 사람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아름다움을 숨기는 게 아니라 드러내면서 첫눈에 눈길을 끌어야죠. 전통도 아니고 현대도 아니라는 평을 들을까 봐 좀 무서워요."

    ―이케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전통 목가구는 짜맞춤으로만 만들어요. 못을 박아 지탱한다면 오래 못 가죠. 나무는 겨울에 수축하고 여름에 늘어나는데 그 짓 몇 번 하면 못 구멍이 헐거워집니다. 이케아는 시장의 필요에 부응한 거죠. 단, 거기서 산 가구를 평생 쓰거나 대를 물리겠다는 생각은 안 하겠지만요."

    ―댁에는 전통 가구만 있나요?

    "집사람이 식탁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도저히 답이 안 나왔어요. 얼마 전 일산 가구공단에 가서 식탁을 사오더라고요. 전통 가구들은 평좌식 생활을 할 때 발달한 형식이라 밥상도 책상도 낮아요. 높이를 올리면 비례가 이상해져요. 전통에서 너무 멀리 가버린 느낌이랄까요. 제겐 숙제예요."

    ―노동운동가와 대기업 직원을 거쳐 이젠 목수인데 어떻게 달랐나요?

    "30대 초반까지는 남한테 좋은 일을 한 셈이죠.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돈을 벌기 위해 대기업에 갔고, 목수는 제가 좋아하는 일이더라고요. 직업을 정할 땐 그 세 가지 중 우선순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일이면서 생활도 되고 남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으뜸이겠지요."

    ―다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뜻인지요.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 있잖아요. 서랍 짜기 좋은 나무, 문짝 짜기 좋은 나무가 따로 있어요. 또 날을 세워야 나무를 깎을 수 있죠. 대패를 숫돌에 가는 과정은 군살을 버리는 것과 같아요. 젊을 땐 이것저것 능력을 붙이려고 애썼어요. 욕심이었고 방황이었죠. 나이 들수록 잘 버려야 합니다. 버리는 게 곧 벼리는 것이랄까요. 이제 쓸데없는 것 안 하잖아요(웃음)."

    ―목공방 이름에 달팽이를 넣었더군요.

    "천천히 살고 느리게 작업하려고요. 달팽이는 어느 순간 그 느린 속도로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닿기도 한다는데 그 점도 닮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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