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독재자의 끝

37년간 아프리카 짐바브웨를 통치했던 독재자 무가베 대통령이 물러났다. 그리고 짐바브웨 국민들은 축제를 열었다.
33년간 독재한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은 반군을 피해 도망치다 총을 맞고 사망했다.
한 나라를 주물렀던 독재자들의 최후는, 그 화려했던 시절과는 다르게 대부분 초라했다.

  • 구성 및 편집=뉴스큐레이션팀 정영민

    입력 : 2018.01.12 09:26

    독재(獨裁):
    1인 또는 소수자에게 정치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형태

    오랜 기간 독재로 억압받았던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연이어 희망의 메시지가 들려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땅이 여럿 있다. 바로 우리 곁에만 해도 세계 유일의 '3대 독재'가 행해지는 나라가 있으며, 아프리카 대륙에선 8명의 독재자가 20년 이상 집권 중이다.

    이들은 자신의 동지들이 몰락하는 소식을 들으며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이쯤에서 세계의 독재자들이 어떻게 끝을 맞았는지 되돌아보자.

    독재의 탄생과 멸망


    나치식 경례를 하는 히틀러와 독일 국민들. /조선DB·생각의 나무 제공.

    1934년 독일 총통에 올라 1945년 사망까지 11년간 집권했다. 기간은 비교적 짧으나 세계사에 큰 획을 그은 최악의 독재자다. 젊은 시절에는 화가가 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을 계기로 나치당에 입당하고, 타고난 연설 능력으로 소수정당이던 나치당을 제1당으로 성장시킨다. 1920년 20명에 불과하던 나치당 당원은 1945년엔 850여 명까지 불었다. 당시의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지지했고, 히틀러는 이를 등에 업고 일당독재 체제를 확립, 총통에 올랐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극도로 혐오했다.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이러한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행된 홀로코스트에서 잘 드러난다. 이때 학살된 유대인 수는 600만 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유대인뿐 아니라 집시, 장애인, 혼혈아 등도 나치는 '열등 인류'로 분류했기에 학살된 사람의 수는 훨씬 많다. 하지만 히틀러는 스스로 일으킨 이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자멸한다.

    최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조선DB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던 1945년 1월, 히틀러는 지하 벙커로 들어간다. 약 17m 지하에 있던 이 벙커에서 그는 마지막 작전 지휘를 펼쳤다. 후일 증언에 의하면, 이때의 히틀러는 매우 쇠약했으며 등이 구부러지고 침을 자주 흘렸다고 한다. 같은 해 4월 30일, 히틀러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동거녀 에바 브라운(사망 하루 전 결혼식을 올렸으니 정확하게는 아내)과 함께 자살한다. 향년 56세였다. 히틀러는 철저한 금욕주의자(술·담배·사치를 하지 않음)였고 브라운과 함께 공식석상에 나선 적도 없었기에, 대다수 국민들은 그에게 동거녀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나, 일각에선 청산가리를 먹고 죽었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히틀러가 1970년대까지 계속 살아있었다는 생존설도 꾸준히 제기된다. 어쨌든 이렇게 최후를 맞이한 독재자는, 오늘날 입에 올리는 것도 금기시되는 끔찍한 지도자로 남게 됐다. ▶관련기사


    '혁명 동지'였던 레닌(왼쪽)과 스탈린. /도서출판 삼인 제공

    1924년 소련의 지도자가 된 뒤 사망할 때까지 약 30년간 집권, 러시아에서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누린 지도자로 남아있다. 그의 전임자인 레닌은 '스탈린에게 최고 지도자 자리를 주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스탈린은 최고 통치자가 됐다. 참고로 스탈린은 본명이 아닌 필명이며, '강철 인간'이란 뜻이다.

    이름 그대로, 스탈린은 강철처럼 냉정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친한 친구나 동지는 물론 자신의 처자식도 믿지 않았다. 이는 곧 대규모 숙청으로 이어졌다. 스탈린은 집권 기간 내내 고위 간부, 군 장교, 인민 등을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 처형한 뒤에는 (현재 북한이 하는 것처럼) 간부들의 모습을 사진에서 지웠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해야 한다'는 건 스탈린의 철칙이었으며, 말년에는 자신을 치료하는 주치의조차 믿지 못할 정도였다. ▶관련기사

    '인간백정'이라 불릴 정도로 잔혹한 독재자였지만, 그에 대해선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스탈린의 집권 기간 동안 소련의 경제가 급성장하여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영국과 손잡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최후

    스탈린의 별장에 대해 다룬 한 TV 프로그램. /MBC '서프라이즈' 화면 캡처

    스탈린은 자신의 별장에서 측근들과 연회를 가진 뒤 잠들었는데 다음날 쓰러진 채 발견됐다. 그의 나이 72세, 공식적인 사인(死因)은 뇌일혈이었다. 하지만 이후 독살설 등이 제기되면서 아직도 그의 사인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스탈린은 항상 암살을 우려해 잠자는 방을 수시로 바꾸고 별장을 미로처럼 꾸몄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치료가 늦어졌다고도 하며, 쓰러진 그를 측근들이 "잠자는 것"이라며 방치했다는 얘기도 있다. 평생 아무도 믿지 못하고 후계자도 키우지 않았던 독재자의 쓸쓸한 죽음이었다.


    (왼쪽) 차우셰스쿠 부부가 만찬을 즐기고 있다. 사진의 오른쪽 아래에 사과가 보이는데, 당시 매우 구하기 어려웠던 과일로 이들 부부의 사치를 나타내주고 있다. /AFP (오른쪽) 차우셰스쿠가 총살 당하기 며칠 전 연설을 하는 모습. /유튜브 캡처

    1967년부터 1989년까지 24년간 루마니아를 끔찍한 독재 치하에 두었던 인물이다. 루마니아의 최고 권력자였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눈에 들어 정치에 발을 들인다. 심복 역할을 하다가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자 대통령이 됐다.

    집권 초반에는 나름 개념있는 공산지도자라는 평을 받다가, 1971년 북한을 방문하고 난 뒤 달라졌다. 김일성의 우상화에 크게 감명을 받고 이를 벤치마킹하여 자신과 그의 아내 엘레나를 신격화하는 작업을 펴기 시작한다. 생가를 성지순례하게 하고 자신과 아내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했으며, 국민들을 동원해 대규모 행사를 열곤 했다. 곳곳에 도청기와 비밀경찰을 배치해 반정부 인사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 당시 공공장소는 물론 가정집에까지 도청기가 설치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인구 증대를 목표로 낙태·피임·이혼을 금지하는 등 해괴망측한 정책들로 국민들을 괴롭혔다.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시대는 점점 공산당 붕괴로 가고 있었지만, 이 독재자 부부만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최후

    차우셰스쿠 부부가 총살 당하는 모습. /유튜브

    차우셰스쿠는 비참한 최후를 맞은 독재자로 손에 꼽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내와 나란히 총살 당했으며, 그 장면은 고스란히 녹화되어 전 세계에 퍼졌다. 훗날 기록을 보면 차우셰스쿠는 총살되기 사흘 전까지 민심을 전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군중들을 모아놓고 충성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전례 없던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상황이 겉잡을 수 없게 되자 차우셰스쿠 부부는 황급히 해외 도피를 시도한다. 이때 도피처로 거론된 나라가 북한이다. 결론은 실패. 붙잡힌 차우셰스쿠 부부는 총살 당하는 순간까지 "너희는 반역자다"라고 외쳤다. 이 부부에게 총을 쏘려는 지원자가 속출해서 몇 명만 추려야 할 정도였다. 부부의 몸에 박힌 총알은 모두 120발. 198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관련기사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 마르코스 부부. 부인인 이멜다는 젊은 시절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할 만큼 굉장한 미인인 데 반해, 마르코스는 키도 작고 왜소해 외모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1965년 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21년간 장기 집권한 독재자다. 집권 초반만 해도 국민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던 대통령이었는데, 당시 필리핀 경제가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다. 1960년대 필리핀의 1인당 GDP는 당시 한국(91달러)보다 3배 많은 270달러로, 중국·일본에 이은 아시아의 3위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필리핀 순방 시 잘 뚫린 고속도로를 보고 부러워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마르코스가 독재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필리핀의 정치·경제 상황은 크게 퇴보한다. 그는 8년간 국가를 계엄 상태에 두고 군부를 이용해 반대파를 숙청·탄압하며 정권을 유지했다. 마르코스를 멸망으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은 1986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의 기행(奇行)이었다. 대선 개표를 중단시키고 자신이 이겼다고 공식 발표하는데, 국민들은 이에 분노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국민의 80%가 믿는 가톨릭교가 선봉에 서 마르코스를 몰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훗날 이 민주화 혁명은 '민중의 힘'을 뜻하는 '피플파워(People power)'로 이름 붙었다.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마르코스는 하와이로 망명한다.

    최후

    박물관에 전시된 이멜다의 구두들. /연합뉴스

    1989년,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심장병으로 숨졌다. 향년 72세. 마르코스는 사망 후에도 필리핀 국민들을 속썩였는데, 일가족이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정권의 반대로 안장되지 못한 채 18년간 미라 형태로 유리관 속에 보관되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두테르테 현 필리핀 대통령의 허용으로 국립묘지로 옮겨왔다.  ▶관련기사

    마르코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부인 이멜다에 관한 얘기다. 미인대회 출신의 영부인이었던 이멜다는 사치가 매우 심했다. 추방되던 당시 그의 방에서 3,000여 켤레의 명품 구두와 수천벌의 속옷, 가방, 보석들이 쌓인 채 발견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마르코스와 이멜다 부부가 머물던 말라카냥 궁의 일부는 현재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관람이 가능한데,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던 이멜다의 구두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디 아민(맨 오른쪽)이 한 여성과 함께 있는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스

    197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1979년 몰락한 독재자다. 다른 이들에 비해 집권 기간은 짧은 편(8년)이지만, '아프리카의 히틀러', '피의 독재자'라 불릴 만큼 잔인하고 악독한 통치를 했다. 정권을 잡자마자 수천명의 정치인과 군인들을 숙청했고, 이들을 지지하던 국민들까지 모조리 학살했다. 시신은 악어밥으로 던져지기 일쑤였는데, 아민의 집권 당시 강에는 늘 수십 구의 시신이 떠다녔다고 한다.

    이디 아민은 갖가지 기행도 펼쳤다. '인육을 먹는다'는 얘기가 가장 유명한데 본인은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자신이 처형한 시신의 일부를 냉장고에 넣어 보관했던 것은 사실이다. 국제 행사에서 백인 노예들이 드는 가마를 타고 등장해 해외 토픽란에 오른 적도 있다. 6~7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자녀는 4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아민은 1978년 탄자니아를 침공하며 몰락한다.

    최후

    이디 아민은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출생년도가 기록되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으나, 거의 80세까지 살았다. 다만 집권 말기에는 탄자니아 침공이 실패하면서 리비아,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 등 객지를 떠돌았다. 최종 정착지는 사우디 아라비아였는데, 정부에서 제공한 집에 살며 부족함 없이 지냈다고 한다. 사망 전 병색이 짙어져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으나 당시 우간다 대통령이 막았다. 결국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숨을 거둔 아민은 비석 하나 없는 황량한 땅에 묻혔다. 우간다 국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몇날 며칠간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왼쪽) 2003년, 미군이 한 민가의 땅굴에서 후세인을 체포한 모습. /조선DB (오른쪽) 재판장에서의 후세인. /AP

    1979년 이라크의 대통령이 된 뒤 2002년 미군에 체포되기까지 23년간 집권한 독재자다. 일찍이 정계에 진출했으며 전임자인 바르크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부통령이 된다. 이때의 후세인은 치밀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이라크의 황금기를 이끄는 여러 정책을 폈다. 지지도가 높아지자 바르크 대통령을 거의 떠밀듯이 사임시키고 자신이 대통령이 됐다.

    후세인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을 롤모델로 삼았다. 스탈린에 관한 책으로만 가득 채운 방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스탈린처럼 측근이나 친한 친구도 믿지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를 하면 곧바로 숙청했다. 집권 첫해인 1979년에만 60여 명의 정치인을 처형했는데, 특히 전체 당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배신자 명단을 발표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하는 방식을 썼다. 자신에게 반대하면 이렇게 된다는 걸 몸소 보여준 것이다. 후세인은 군복을 자주 입었으며 이라크 전역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최후

    후세인의 사형 집행 모습. /조선DB

    후세인을 멸망케 한 건 전쟁이었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전을 치르며 이라크를 전세계 최빈국으로 전락시켰고 사실상 실권을 잃었다. 그런 와중에 9 ·11 테러를 계기로 미국이 침공하자 졸지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가 최종적으로 발견된 곳은 어느 민가의 땅굴이었다. 1년여간의 긴 재판 끝에 사형 당했다. 걸프전 당시 쿠르드족을 대량 학살한 것이 가장 큰 죄였다. 사형 집행 당시 얼굴에 두건을 쓰는 것을 거부했다고 알려진다.

    후세인의 사형은 2006년 12월 30일에 조기 집행됐는데, 그 이유가 이슬람 율법에서 만 70세 이상이 넘으면 사형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세인은 만 70세를 4개월 앞두고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관련기사

    밀로셰비치가 자행한 스레브레니차 학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 /위키미디어 커먼스

    1989년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뒤, 2000년 물러나기까지 11년간 집권한 독재자다. 세르비아는 유고 슬라비아에 속한 하나의 공화국이었는데, 밀로셰비치는 타 인종을 배척하고 세르비아 패권주의를 추구했다. 이러한 그의 야심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전쟁인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이어진다. 종전 후 유고 연방은 해체되었다.

    밀로셰비치의 씻을 수 없는 죄악은 전쟁 상황을 이용한 '인종 청소'다. 가장 유명한 사건이 8,000명 이상의 보스니아인을 대량 학살한 '스레브레니차 학살'이다. 이슬람 교도를 없애기 위해 세르비아군이 자행했다. 내전이 끝난 후 국제형사재판소는 전범인 밀로셰비치를 단죄하기 위해 재판을 열었으나, 그는 "조국과 국민을 위해 내가 한 일이 자랑스럽다"며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여담으로 밀로셰비치는 어렸을 때 부모가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것이 그의 잔혹한 성격에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최후

    알바니아계 코소보 난민이 클린턴이 밀로셰비치를 쓰러뜨린 신문 만평을 보고 기뻐하고 있다. /조선DB

    밀로셰비치를 몰아낸 건 민중 봉기였다. 그가 투표 결과를 조작하여 또다시 대통령이 되려 하자, 이에 반발한 반정부 시위대가 트랙터 등 중장비를 몰고 국영 방송사 및 정부청사를 점거한다. 이것이 '불도저 혁명'이다. 밀로셰비치는 권좌에서 물러난 후 '전범'으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의 재판을 받았는데 판결이 나오기 전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숨진 채로 발견돼 자살이나 독살일 거란 얘기가 있었지만, 부검 결과 사인은 심장마비로 밝혀졌다. 수감 중 고혈압에 시달렸던 밀로셰비치는 밖에 나가 치료받기를 원했으나 ICTY 측이 허용하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관련기사


    카다피의 현란한 의상은 미국 언론에서 "정신 상태를 의심케 하는 미친 옷"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조선DB

    1969년 쿠데타로 전임 지도자를 몰아낸 뒤 정권을 잡아 2011년 축출될 때까지 42년간 집권했다. 많은 독재자들이 그랬듯, 카다피도 집권 초기에는 리비아의 발전에 힘썼다. 당시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국가였다. 하지만 지독한 반미(反美)주의자로 테러 단체를 지원했으며 미국의 여객기 폭파사건에 개입하기도 해, 미국에서는 그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그는 온갖 기행으로 세계의 조롱거리가 됐다. 늘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는데 그 이유에 대해 "내 미래가 너무 밝아서"라고 했고, 외국 방문 땐 부족 전통의 텐트를 가져 다니며 그곳에서 숙박했다. 전통 의상을 입고 96분간 유엔 연설을 하다 유엔헌장을 찢어버린 적도 있다. 카다피 사후 그의 요새에서 미국의 전 국무장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의 사진첩이 발견돼, 그가 라이스를 짝사랑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최후

    (위) 시민군의 손에 죽음을 당한 카다피의 최후 모습. (아래) 카다피의 황금 권총을 빼앗은 시민군. /연합뉴스

    카다피는 차우셰스쿠와 마찬가지로 시민 손에 최후를 맞았다. 후문으로는 이 두 사람의 죽음을 보고 북한 김씨일가가 충격을 받았다고.

    2011년 아랍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리비아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번지자, 카다피는 시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 전투기까지 동원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나토(NATO)가 개입하며 시민군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일국의 독재자였던 카다피는 한 콘크리트 하수구 속에서 발견된다. 그는 최후의 순간 '쏘지마'라고 말하며 목숨을 구걸했으며, 엉덩이를 칼에 찔리고 모래 세례를 받는 등 수모도 당했다. 그의 시신은 한동안 정육점의 냉동창고에 전시돼 지나다니는 시민들이 모두 볼 수 있었다. ▶관련기사


    (왼쪽) 무바라크가 리비아 최고통치자인 카다피와 함께 있는 모습. /AP (오른쪽) 감옥에 수감된 무바라크. /뉴시스

    1981년 이집트의 4대 대통령이 된 뒤 29년간 집권했으며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는 독재자다. 이스라엘과의 중동전쟁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워 '국민 영웅'이 되고 부통령 자리까지 올랐다. 전임 대통령이 갑자기 암살 당하면서 무바라크가 자리를 승계했다.

    무바라크는 정권을 잡은 이후 줄곧 비상 계엄령 치하에 통치를 했다. 대외적으로는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항한다는 이유였다. 대선을 5번 치러 5번 연임에 성공했는데, 사실상 후보가 자신 한 명 밖에 없었으며 국민들은 찬반 투표만 할 수 있는 체제였다. 또한 부통령을 공석으로 두며 후계자를 키우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 '현대판 파라오'라고도 불린 무바라크는 2011년 이집트 혁명으로 운명이 바뀐다.

    최후

    2014년 공판에 나서던 무바라크가 들것에 실린 채 지지자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뉴시스

    30년 가까이 군림한 독재자가 아들에게 세습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마침내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혁명의 불씨가 이집트까지 옮겨붙은 것이다. 하지만 무바라크 정권은 무력 진압으로 이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850여 명이 숨지는 유혈사태가 발생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무바라크는 대선 불출마 의사를 밝히며 하야한다. 

    이후 교도소에 수감된 채 재판을 받았는데, 혼수상태라는 둥 뇌사라는 둥 말이 많았지만 2014년 살아있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반정부시위 도중 시민들을 학살한 혐의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며 버텼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석방되며 지지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은 전세계인에게 씁쓸함을 주었다.


    (왼쪽) 1980년 김일성과 만난 무가베. /유튜브 (오른쪽) 92세 생일파티를 하는 무가베. /연합뉴스

    1980년 짐바브웨의 첫 총리가 된 뒤 1987년 대통령에 당선, 37년간 통치한 독재자다. 젊은 시절에는 독립투사로 명성이 높았으나, 대통령이 된 후 폭정을 일삼고 나라의 경제를 초토화시켰다. 특히 2008년 짐바브웨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짐바브웨 정부 추산 2억%~3억%)은 경제학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다. 무가베 집권 전 인플레이션율은 7%대였다. 이 인플레이션으로 짐바브웨의 화폐는 휴짓조각이 되어 사라졌고, 실업률은 80~90%까지 치솟았다. 그럼에도 무가베는 매년 성대한 생일파티를 열었는데, 지난해 92세 생일 때에는 10억 원을 들여 무게 92kg의 케이크를 만들었다. 90세가 넘는 나이임에도 상당히 건강한 편이다. 그는 자신의 장수 비결에 대해 '배부를 때까지 먹지 않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관련기사

    한편, 무가베는 집권 초기부터 김일성의 통치 방식을 추종했다. 김일성처럼 자신의 생일을 국경일로 만들고 주체사상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다. 총 8번 방북했는데, 새끼 코끼리·얼룩말·기린 등 야생동물을 잡아 선물하기도 했다. '검은 김일성'으로 불리며 '집무실에서 죽고 싶다'는 야욕을 밝혀오던 무가베는 결국 쿠데타로 축출됐다.

    최후

    (위) 무가베와 그의 41세 연하 부인 그레이스 무가베. (아래) 무가베가 축출된 뒤 기뻐하는 짐바브웨 국민들. /AP·로이터 연합뉴스

    쿠데타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가베의 41세 연하 아내 그레이스 무가베다. 그가 자신의 아내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기 위해 유력 차기 대권주자를 해임하자 군부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가 발발하자 무가베는 가택 연금 상태에 있다가 사임했다. ▶관련기사

    한편, 그레이스 무가베는 온몸에 명품을 휘감고 다녀 '구찌 그레이스'라고 불렸다. 무가베의 비서실에서 일하다가 불륜 관계로 두번째 부인이 된 인물이다. 그레이스 무가베와 그 자녀들은 사치스러운 모습으로 자주 구설에 올랐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한 가게에서 약 1억870만원 어치를 쇼핑한 적이 있으며, 아들 고레라자는 6600만원짜리 롤렉스 시계를 자랑하며 '아빠가 나라를 다스리면 이런 시계를 찰 수 있다'고 써 올려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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