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가끔은 느려져도 좋아요

조선일보
  • 백영옥·소설가
입력 2017.11.25 03:01

[작품 속으로] 사생활의 천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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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적인 미래의 시작은 어디일까? 라디오 PD인 작가는 “사생활”이라고 답한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밤과 낮, 반복되는 일과, 언제 봐도 비슷비슷한 풍경…. “사소한 일상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플리커
세이셸에 다녀왔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 근처 작은 나라다. CNN이나 BBC가 선정한 세계 최고 해변이라거나,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이나 영국 윌리엄 왕세손의 휴양지라는 홍보 문구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인구 9만명 나라에, 인구의 세 배가 넘는 거북이가 산다는 것이었다. 수도 빅토리아엔 신호등이 달랑 4개뿐이다. 빅토리아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수도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처음 세이셸에 간 건 마라톤 취재를 위해서였다. 이 작은 나라에서 국제 마라톤이 열린다는 것도 놀라웠고, 동네 아이들이 죄다 몰려나온 풍경도 신기했다. 운동화를 신지 않은 아이들이 가젤처럼 가뿐히 뛸 때마다 눈부시게 흰 발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선수들을 위한 스프링클러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뛰다가 지치면 언제든 파란 바다에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았(고 나는 실제 뛰어 들었)다.

세이셸에서 비행기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버드 아일랜드'라는 섬이 있다. 활주로라기보다 평평한 흙바닥에 비행기가 착륙하면 주위에 방갈로가 몇 보인다. 그곳이 여행객이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숙소다. 이름처럼 그곳은 새들의 섬으로, 수천·수만 마리 새가 주인이다. 이 섬에는 기네스 최고령 거북이가 살고 있다고 했다. 거북 이름은 에스메랄다. 1777년에 태어났다. 세이셸의 알다브라 거북이들은 100년에서 300년까지 산다고 했다. 나로선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는 시간이다. 에스메랄다는 놀랍게도 방갈로 주위를 느릿느릿 걸어 다니고 있었다. 에스메랄다 주위에는 여기저기 새가 보였다. 사진을 찍으러 다가가도 이곳 새들은 사람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난 노래할 테니 시끄러우면 네가 알아서 피해!"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수도 없이 많은 새를 휴대폰에 담을 수 있었다. 전화가 터지지 않으니 어차피 휴대폰은 카메라로밖엔 쓸 수 없기도 했다.

'파리예를 위한 저녁 9시에서 10시의 시'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아직 건너지 않았다." 버드 아일랜드의 바다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 이 시가 늑골에서부터 밀려나왔다. 이 시를 한동안 외우고 다녔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구가 파도처럼 밀려 내려왔다. "가장 아름다운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날들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말은 아직 내가 하지 못한 말이다."

바다가, 구름이, 새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이전의 내가 수없이 봤던 바다고, 구름이고, 하늘이었지만 새들이 주인인 그곳의 '그것'은 달랐다. 천국이 있다면 내가 살아서 그곳을 보는구나 싶었다. 너무 아름다운 걸 보면 말문이 막혀 눈물이 흐른다.

"언젠가 오솔길을 걷는데 경운기 한 대가 지나가다가 사과 궤짝을 떨어트리는 바람에 사과 알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시장의 규칙만 있다면 이 일은 누군가 손해 본 사과 이야기로 끝났겠지요. 하지만 잠시 후 그 사과 알들 옆에 까치랑 청설모가 모여들었습니다. 그 새벽에 새들과 청설모는 신나고 바빴지요. 나도 성하고 예쁜 걸로 한두 알 주워서 주머니에 고이 넣어뒀다가 나에게 언제나 친절했던 풀빵 집 소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마치 시장의 일만 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마치 시장의 일만 있는 것처럼 돌아가고 있지만 사실 자연의 일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즈음 나는 숲을 걸으면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종에 다 해당되는 규칙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생명체는 예외 없이 한 번 나면 한 번 죽는다거나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는 사실 같은 것 말입니다. 나는 그걸 거스를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정혜윤의 책 '사생활의 천재들'에는 모두 여덟 사람이 등장한다. 영화감독,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 만화가, 경제학자와 천문대장…. 책에는 아름다운 문장이 숲처럼 무성한데, 문장 하나가 미문이 된 건 그것을 치장하는 형용사나 부사의 힘이 아니다.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의 삶이 아름다운 탓이다. 자연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담긴 온도가 높기 때문인 것이다. 이 문장을 읽는데 작업실 앞 공원이 떠올랐다. 가을에 많이 걸었던 탓에 그곳에서 유독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을 자주 봤다. '도토리 채취 금지'라는 푯말 앞에서도 까만 비닐봉투를 쥔 채 의욕적으로 도토리를 줍는 사람도 있었다. 도토리가 없으면 굶어야 하는 작은 생명을 헤아린다면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싶어 많이 속상했다.

나는 '버드 아일랜드'에서 사생활의 천재가 되는 법을 헤아려보기 위해 자주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건 '새의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였다. 목소리의 원형질을, 그 형태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생각이 많은 부분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은 건 이곳에 도착한 지 딱 하루 만이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밤에 잠을 자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알량한 생각 같은 것 말이다. 새들은 그야말로 밤새 울었다. 지지배배, 쫑쫑이 아니라 '꽤애애애애애액~' 마치 비명을 지르듯 우는 새도 있었다. 자연이 고요하고 평온할 것이란 내 생각도 어찌 보면 도시 생활에 지친 내 편에서 상상해낸 편견일 수 있겠다 싶었다. 자연은 끊임없이 소리를 생산하고 그것을 실어 나른다. 인공 소음이 사라진 곳에 있으면 그 소리는 날것처럼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날벌레 소리,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와 후다다닥 움직이는 도마뱀들의 기민한 발걸음까지, 아침의 휴대폰 알람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울어대는 새소리에 눈이 절로 떠졌으니 말이다.

●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의 산문집
근처에 식당이나 마트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니, 머무는 사람은 다 함께 모여 밥을 먹었다. 아침이면 새들이 날아와 자주 토스트와 오믈렛 조각을 노렸지만 손을 휘저어도 잘 도망가지 않았다. 그곳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스콜이 내리고 구름이 몰려오다가도 땡볕이 피부에 내리꽂혔다. 화창한 바다를 걷다가 거짓말처럼 번개가 치는 먼 곳의 하늘도 보았다. 갑자기 눈이 좋아진 것처럼 느껴졌지만 시야를 가리던 먼지에서 해방된 것뿐이다. 나는 도심의 바쁜 삶을 싫어하지 않는다. 인생을 느리게 사는 게 꼭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건 내 속도에 맞춰, 내 보폭에 맞게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어느 순간엔 치열하게, 어느 때는 느릿하게 말이다. 이곳에선 200살 넘게 산 거북처럼 느려져도 좋았다. 꾸벅꾸벅 졸다가 새 두 마리가 내 곁에 앉아 서로 부리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았다. 거북의 속도로 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의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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