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첩서 뛰쳐나온 혜원·겸재, 디지털 만나다

    입력 : 2017.11.23 03:03

    간송재단 '바람을 그리다' 展… 미디어아트로 내일 DDP서 개막

    '혜원전신첩' 원화 30폭도 공개
    정선의 금강산, 영상으로 재탄생
    이영희가 재현한 한복도 선보여

    늦은 밤 술집 앞마당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웃통을 벗어젖힌 선비, 멱살 잡혀 갓이 벗겨진 또 다른 선비를 무예청 별감이 말리고, 푸른 치마 여며 쥔 채 담뱃대를 길게 문 기생은 재미난 구경거리라는 듯 능청스레 웃는다. 달빛 은은한 담벼락엔 선남선녀가 얼굴을 붉히고 섰다. 이제 막 담모퉁이 돌아 나들이를 떠나는 연인. 호롱불 들고 으슥한 밤길 걸어 어디로 가려는지. 담벼락에 적힌 시구가 답을 준다. '달빛 침침한 한밤중,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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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발령 고개에서 금강산을 바라본다'는 뜻의‘단발령망금강’을 미디어아트 작가 이이남이 현대 영상물로 재현한 작품. 단발령과 금강산 사이 운해가 펼쳐져 있던 겸재 정선의 원작에 불야성 서울의 밤 풍경을 그려넣었다. 산과 고개 사이를 오가는 케이블카가 관람객의 웃음보를 터뜨린다. /이태경 기자
    조선 최고 풍속화가 신윤복의 '유곽쟁웅'과 '월하정인'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던 간송미술문화재단 탁현규 학예연구원은 "디테일과 드라마가 살아 있는 혜원의 그림은 요즘으로 치면 영화의 스틸컷"이라며 "한류 드라마의 원조가 바로 신윤복"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혜원·겸재가 디지털을 만났을 때

    허언(虛言)이 아니다. 간송미술재단이 파격의 실험을 단행했다. 24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막하는 '바람을 그리다: 신윤복·정선' 전시는 혜원·겸재라는 조선의 두 거장과 디지털이 만나 빚어낸 유쾌한 미디어아트 전시다. 국보 135호인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원화 30폭이 모두 공개되고, 정선의 '해악전신첩' 12폭을 포함한 금강산 그림 26점이 원화로 전시되는 동시에 이 두 걸작을 2D 애니메이션처럼 영상화한 대형 미디어아트 17점이 관람객과 만난다. 간송C&D 신도성 대표는 "고미술은 진부하다, '엉클 브랜드다'라는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며 "신윤복과 정선의 작품이 고흐, 클림트 못지않게 미디어아트의 훌륭한 소재가 되리라 확신했다"고 말했다.

    '비밀의 화원'으로 불렸던 성북동 시절 간송 전시에 익숙한 관람객이라면 이 낯선 실험에 당황할지도 모른다.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맞는 첫 장면부터 '애니메이션'이다. 신윤복의 '월야밀회', 정선의 '단발령망금강' 등 6점의 작품이 살아 꿈틀거린다. 제3의 선비가 등장해 그림에서 그림으로 넘어가며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줄거리. 개구멍으로 들어간 선비가 길모퉁이에서 와락 껴안은 한 쌍의 남녀를 훔쳐보는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한 마리 학이 되어 금강산으로 날아가는 모습에 탄성이 터진다. 신윤복의 '쌍검대무'도 역동감 넘치는 영상으로 태어났다. 양반들, 악공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색의 무희복을 입고 현란한 칼춤을 추는 영상이 발길을 붙든다.

    ◇고미술? 고루하지 않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에서 그네 타는 여인의 옷을 재현한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의 작품.
    신윤복의 '단오풍정'에서 그네 타는 여인의 옷을 재현한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의 작품. /김윤덕 기자
    술·춤·사랑·놀이를 테마로 흥이 넘치는 신윤복의 세계를 즐기고 나면, 금강산 진경을 화폭에 담은 정선의 위엄 어린 산수를 미디어아트로 만난다. 현대미술 작가 이이남은 정선의 걸작 '단발령망금강'과 '금강내산'을 화려하고도 기품 있는 풍경으로 재탄생시켰다. 원작 속 금강산과 고개 사이에 펼쳐진 아득한 운해를 마천루로 가득 찬 불야성의 서울 풍경으로 채워 넣었는데, 마치 현대판 무릉도원 같다.

    물론 젊은 세대를 홀리는 미디어아트만 있는 게 아니다. 영상물 사이 두 거장의 진본이 오롯이 자리했다. 다만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원화는 12점씩 매달 교체돼 선보인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씨가 신윤복 풍속화에 등장하는 여인과 선비의 의상을 재현한 '오트 쿠튀르 한양' 코너는 전시의 별미다. "혜원전신첩은 당대의 최고급 패션 화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단오풍정'에서 그네 타는 여인의 치마저고리를 비롯해 사대부의 옥색 두루마기, '쌍검대무'에 등장하는 무녀 의상까지 다섯 벌을 고증해 전시한다. 젊은 세대를 고미술로 끌어들이기 위한 간송의 눈물겨운 노력은 인스타그램 형식을 빌린 작품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쌍검대무'엔 '#조선판킬빌' '#BGM빵빵' '#옷자락 휘날리며'가 키워드로 달렸다. 전시는 내년 5월 24일까지. (02)215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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