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뜻에 따라 연명(延命) 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존엄사법)' 시범사업이 시행된 이후 존엄사를 택해 임종한 환자가 처음 나왔다. 2009년 김 할머니 존엄사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합법적 존엄사 사례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

21일 의료계에 따르면 연명 의료 시범사업에 참여 중인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에서 소화기 계통 암으로 치료받던 50대 남성이 지난주 사망했다. 임종 환자는 약 한 달 전 "연명 의료를 받지 않겠다"며 연명의료계획서에 서명했고, 의료진은 본인 의사에 따라 임종기에 접어들었을 때 인공호흡기 착용, 심폐 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을 시행하지 않았다. 연명 의료 중단을 선택해도 영양이나 물 공급, 통증 완화 치료는 계속 이뤄진다. 환자는 최근 병세가 악화해 자연사(自然死)했다.

의료계 관계자는 "이 환자는 연명 의료 중단 절차에 대해 설명했을 때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했으며, 적극적으로 '연명 의료 중단' 의사를 표현했다"고 밝혔다. 암 환자들은 대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선 '죽음'을 말하지 않는 성향이 강한데, 또렷하게 의사 표현할 능력이 있던 말기 암 환자가 존엄사 의사를 밝힌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란 게 의료계 설명이다.

홍양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대표는 "임종 앞둔 환자가 연명 의료를 안 하겠다고 결심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더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는데, 어려운 상황에서 큰 결정을 내린 것"이라며 "이번 결정은 연명 의료 중단에 대해 고민할 많은 분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내년 2월 존엄사법의 본격 시행을 앞두고 지난달 23일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작성·등록과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및 이행 등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는 모두 연명 의료나 호스피스 이용 여부를 물어 기록해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2009년 첫 판례 이후, 국내 첫 합법적 존엄사 ]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건강한 사람 등 19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연명의료계획서는 말기·임종기 환자 등 ‘죽음의 문턱’에 든 환자가 의사와 함께 작성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보건복지부와 각 병원 등에 따르면 20일 현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는 1648명,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자는 7명(이 중 1명 사망)이다.

연명 의료 중단 논의는 임종기 환자가 죽음이 임박했을 때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 과도하게 생명을 연장하다 보니, 정작 환자가 가족과 이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등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할 기회까지 박탈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내년 2월 시행할 ‘연명의료결정법(존엄사법)’이 웰다잉법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이 법은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6년 1월 17일 입법화됐다. 지난 1997년 서울 보라매병원에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뗀 의사와 가족이 살인죄로 기소된 지 18년, 2009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식물인간 상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떼 달라는 가족의 요구를 대법원이 받아들인 ‘김 할머니 사건’ 이후 6년여 만에 마련된 법이었다.

연명 의료 중단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다는 의미는 있지만, 그 절차가 너무 복잡해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번 50대 암 환자를 담당한 의료진 역시 환자가 임종기에 들어섰을 때 작성해야 할 서류 하나를 빼먹은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연명의료결정법을 따르려면 환자의 의사 능력이 있는지, 의사 표현은 가능한지에 따라 연명 의료를 묻는 확인 방법이 세부적으로 갈리고, 수십 종에 이르는 관련 서류를 경우에 맞게 골라 써야 해 부담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교수는 “연명 의료 절차를 보다 간소화하고, 국내 의료 상황에 맞도록 손질하는 게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현재 연명의료계획서 작성과 이행은 강원대병원, 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고려대구로병원, 서울대병원, 서울성모병원, 세브란스병원, 영남대의료원, 울산대병원, 제주대병원, 충남대병원 등 10개 의료기관에서 작성할 수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각당복지재단, 대한웰다잉협회,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세브란스병원, 충남대병원 등 5곳에서 작성할 수 있다.

☞연명의료계획서

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임종기 환자가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 착용 등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 의사가 이 뜻에 따르겠다고 확인하고 작성하는 문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19세 이상 성인이 현재 건강 상태와 상관 없이 추후 자신이 말기·임종기에 들어섰을 때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히는 취지로 작성하는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