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은 우방 국가들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취임 첫날부터 "민족(북한)은 우방에 앞선다"며 미국을 자극했다. 40대인 클린턴 대통령을 손아래 취급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말로 일본과 최악의 관계를 자초하기도 했다. 외환 부족 사태가 터지자 일본 은행들이 앞장서 외화를 빼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일부에선 이를 일본의 보복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미국은 "IMF(국제통화기금)에 가라"고 압박했다.
▶IMF 사태는 '제2의 경술국치'로 불렸다. 무능한 정부와 차입 경영에 빠진 기업이 나라를 치욕스럽게 만들었다. 그래도 주저앉지는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장롱 속 돌 반지와 금 패물을 꺼냈다. 해고 태풍 속에서도 243만명이 참여해 벨기에의 국가 보유고와 맞먹는 금을 모았다. 위기 앞에서 뭉치는 한국민의 저력에 세계가 감탄했다.
▶그런데 오늘 본지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다시 외환 위기가 와도 금 모으기 같은 고통 분담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38%에 달했다. 동참하겠다는 응답(29%)보다 훨씬 많다. '나라가 잘돼야 나도 잘된다'는 공동체 의식이 약해졌다는 얘기다. 양극화와 계층 고착화가 심해진 때문일 것이다. 일자리는 안 생기고 서민 경제가 빡빡해졌다. 내 미래도 안 보이는데 공동체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저마다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분위기다.
▶지금 세계 경기의 회복으로 수출이 살아나면서 국내 경기도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제2의 위기'를 걱정하는 분석도 적지 않다. 구조 개혁을 해야 할 때에 포퓰리즘이 극성을 부리는 것이 가장 문제다. 미·일과의 관계에 틈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급성이냐 만성이냐의 차이뿐이라고 한다. 20년 전 위기가 심장마비라면 지금은 만성 암에 걸린 상황이라는 것이다. 과거처럼 외환이 모자라 부도날 가능성은 적어졌다. 하지만 경쟁력이 떨어져 활기를 잃어가는 시나리오는 현실감을 더해가고 있다.
▶추락하는 순간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는 게 냉혹한 국제 현실이다. 20년 전 'IMF행'을 발표했던 임창렬 경제 부총리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숨이 멈출 때까지 살이 뜯기고 피를 빨리는 약자(弱者)였다." 극적으로 회생했던 한국 경제가 다시 한계점에 부닥쳤다. 똘똘 뭉쳐 위기를 헤쳐나가는 국민적 결기도 사라졌다. 한국 경제가 주전자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쇠락하고 있다는 경고가 끊이지 않는다. 내일(21일)은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한 지 20년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