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95] "콜라는 좀 하이클래스가 마시는 음료" 남북대화 등 VIP 회의 테이블에도 단골

    입력 : 2017.11.15 03:13

    1964년 7월 21일 오후, 윤보선 민정당 대표(전 대통령) 자택에서 열린 당무회의 도중 윤 대표와 유진산 의원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둘러싼 야당 내 강경·온건 노선의 대립이 근본 원인이었다. 윤보선이 재떨이로 방바닥까지 치면서 유진산과 고성을 주고받았다. 화를 못 이긴 윤보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다가 음료 잔이 날아가 다른 참석자의 옷을 진한 갈색으로 물들이고 말았다. 당시 당무회의 석상에 놓인 음료가 다름 아닌 콜라였다. 신문은 이날의 일을 '코카콜라 소동'이라고 명명했다(경향신문 1964년 7월 25일 자). 반세기 전, 나이 지긋한 정계 거물들은 심각한 회의장에 다른 음료 다 놔두고 하필 콜라를 놓았다. 오늘의 상식으론 고개가 좀 갸우뚱해지는 일일지 몰라도, 1960년대라면 정당 회의장의 콜라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시절 콜라의 '지위'는 오늘과 달랐다. 부담 없이 들이켜는 값싼 음료가 아니라, 신경 써야 할 손님에게 내도 손색없는 '고급' 음료 반열에 올라 있었다. 값부터 만만찮았다. 초창기의 콜라를 오늘의 1.5L 페트병 한 병만큼 사려면 요즘 화폐로 약 1만9000원쯤 들었다.

    1947년 2월경 갓 쓴 노인이 콜라를 마시는 모습. 광복 직후 한반도에 온 미군 혹은 미 군사고문단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1966년 국산 업체가 낸 콜라와 사이다 광고.
    1947년 2월경 갓 쓴 노인이 콜라를 마시는 모습. 광복 직후 한반도에 온 미군 혹은 미 군사고문단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은 1966년 국산 업체가 낸 콜라와 사이다 광고.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초창기의 콜라가 특별한 대접을 받은 건 낯설고 자극적인 '서양의 맛'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사이다는 구한말부터 오랜 세월 마셔왔지만, 콜라는 광복 후 이 땅에 들어왔다. 미군부대 등으로부터 흘러나온 콜라는 소수 부유층이나 맛봤다. 1961년부터 국내업체도 만들기 시작해 한동안 국산콜라 시대가 전개되다가, 1968년 코카콜라, 1969년 펩시콜라가 국내 생산을 시작하면서 두 콜라가 시장을 평정했다. 1969년 여름 서울시내 거의 모든 다방에선 냉음료 매출 중 70% 이상을 콜라가 차지했다. 냉커피나 오렌지주스가 버티고 있던 냉음료 인기 1위의 자리를 콜라가 빼앗았다. 신문엔 "다방이 아니라 콜라방이 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탄산음료계의 '굴러들어온 돌'인 콜라는 '박힌 돌'인 사이다도 밀어냈다. "발그스름한 빛깔과 독특한 코카(coca) 향이 인기 요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지금 사이다는 주로 서민층에, 콜라는 좀 '하이클래스'에서 이용되고 있다"고 쓴 기사도 있었다(매일경제 1966년 5월 31일 자). 1975년 어느 교수의 신문 칼럼에는 "국산차나 사이다를 마시는 것이 콜라를 마시는 것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계몽을 하자"는 대목이 보인다. 역설적으로 콜라의 이미지가 얼마나 우월했는지 읽힌다. 국정감사 나온 국회의원님들 책상부터 남북대화 테이블에까지 콜라가 올랐다.

    '설탕 덩어리'인 콜라를 지나치게 마셨을 때의 문제에는 눈 돌리지 않고 알싸한 자극에만 빠졌던 중독의 역사는 이 땅에서 그렇게 길고 깊었다. 오늘날 과도한 섭취가 성인병과 비만을 부를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는 높아가는데도 국내의 콜라 매출은 늘고 있는 추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콜라를 지난주 방한한 트럼프 대통령이 국빈 만찬에서 건배 음료로 높이 들었다. "국빈 만찬에서 콜라라니…"라고 황당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을 법하다. 하지만, 콜라가 이 땅에서 VIP 용이었던 시절도 있었으니 트럼프의 콜라 건배가 아주 생뚱맞은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점 일회용 컵에 주로 담기던 콜라는 그 만찬 날 모처럼 고급 글라스에 담겨 예전의 영화(榮華)를 아주 잠깐 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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