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麗水漫漫] '배에서 해 봤어요?'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입력 : 2017.11.15 03:12

    중고차 값 주고 장만한 배 타고 바다에 나가 또 다른 세상을 배운다
    매일 49분씩 늦어지는 '물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시간' 있어
    23.5도 기울어 있는 지구처럼 권력도 기울고 바뀌어야 공정한 사회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뭍에서 보는 석양과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타고 보는 석양은 완전히 다르다. 벌겋게 흔들리는 가을 바다는 칸트가 이야기한 '장엄의 미학(Ästhetik des Erhabenen)'의 완성이다. 서술할 만한 미사여구가 없다. 그저 압도당할 뿐이다. 배 운전면허증이 있는 자만이 누리는 호사다. 여수에 앞으로 계속 살 생각이면 배 조종 면허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박치호 화가의 꼬드김이 한몫했다. '해양 레저'가 활성화되면 나중에 어딘가에는 분명 쓸모 있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배를 타지 않을 거라면 여수까지 내려올 필요는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도 했다. 며칠을 고생해서 '수상레저기구 조종 면허'를 땄다. 면허가 있으니 배 운전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렌트 보트'는 없다. 내친김에 배도 사버렸다.

    나도 이젠 '선주(船主)'다. 친구들에게 배를 샀다고 자랑하면 죄다 비키니의 처녀들이 샴페인을 들고 있는 요트를 상상한다. 그러나 내 배 사진을 보여주면 '쳇' 하고 이내 고개를 돌린다. 1.5톤이 조금 넘는 배다. 폐차 수준의 중고차 값을 주고 샀다. 그래도 박 화가는 지중해풍으로 색을 칠해야 폼 난다며 반은 진한 녹색으로, 반은 흰색으로 칠했다. 배를 여수 앞바다에 처음 내리던 날, 난 숨이 막힐 정도로 흥분했다. 그러나 배를 바다에 내리고, 첫 시동을 거는 순간 바닥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순간 잠수함을 잘못 산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배를 다시 들어 올려 고쳐야 했다.

    정치하면서 힘든 길만 아주 골라 다니는 영춘이가 여수에 들렀을 때, 배 자랑한다고 태우고 나갔다가 배가 멈춰 선 일도 있었다. 뭔 배가 이 모양이냐는 핀잔만 잔뜩 들으며 간신히 배를 고쳐 몇 시간 만에 겨우 돌아왔다. 그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등에 진땀이 쫙 흐른다. 하마터면 '해수부 장관이 고물 친구 배 타고 나갔다가 조난당했다'고 신문에 날 뻔했던 거다. 수차례 수리한 끝에 내 배는 이제 아무 문제 없이 잘 달린다. '배는 사면 기쁘고, 팔면 더 기쁘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듣지만, 배를 타며 나는 이제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을 배운다.

    김정운 그림
    내 배 앞으로 해가 진다! /그림 김정운

    '물때'다. 여수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밀물과 썰물이 하루 두 번씩 반복되는 건 알았지만, 만조와 간조 시간이 매일 정확히 49분씩 늦어진다는 것은 몰랐다.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시간이 24시간 49분이기 때문이다. 매일 물이 들락거리는 속도도 달라지고, 물의 양도 달라진다. 물이 가장 많이 들고 빠지는 때가 '사리'다. 물이 가장 조금 들고 빠지는 때는 '조금'이다. 사리 때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물이 빠지면 수백 미터 앞까지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를 끌고 나갔다가는 바다에서 몇 시간을 그냥 떠 있어야 한다.

    '물때'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이다. 살다보면 '물때'와 같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이 들 때가 있고, 나갈 때가 있다. 잘될 때가 있으면, 안될 때가 당연히 있다. 이 '물때'와 같은 시간마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조급함'이다. 항상 잘되어야 하고, 안되면 불안해 어쩔 줄 모르는 조급함 때문에 참 많은 이들이 불행해졌다.

    한때 화가들은 시간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다. 칸딘스키, 클레와 같은 화가들은 리듬, 멜로디와 같은 음악적 요소들을 붓으로 그리려 시도했다. 회화나 조각, 건축이 '공간예술(Raumkunst)'이라면 음악은 '시간예술(Zeitkunst)'이다. 원근법으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에 아주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한 화가들이 이제는 4차원의 시간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추상회화의 시작이다.

    20세기 초반의 다양한 추상회화 시도들 가운데서 네덜란드의 풍운아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의 통찰은 아주 기막히다. 몬드리안과 함께 '데 스틸(De Stijl)' 운동을 주도했던 두스뷔르흐는 시간의 본질을 '대각선'으로 파악했다. 한마디로 시간은 기울어져 흐른다는 것이다. 화면 한가운데 대각선을 그려 넣어,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구성을 표현한 두스뷔르흐의 1923년 작품 '반구성(Counter-construction)'은 수직선과 수평선을 고집했던 몬드리안과 결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시간은 기울어져 흐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바꿔가며 시간이 흐르는 이유도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져 흐르는 시간이 못마땅하다고 지금 당장 기둥을 수직으로 곧추세우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흐름을 배제한 평등은 가짜다. 50대50의 공간적 평등은 없다는 이야기다. 흐르는 시간에 따라 권력의 주체가 기울고 바뀌어야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다. 이내 또 기울 것을 알아야 겸허해진다.

    여수 바다에서 배를 타다 깨달은 이 느닷없는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광선이 형에게 물었다. '배에서 해 봤어요?' 광선이 형은 잠시 멈칫하더니 '아니. 아직 못 해봤어. 근데… 많이 달라?'하며 아주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야 알았다. 그는 '해 봤냐?'는 내 질문을 '해봤냐?'로 이해한 거다. 젠장, 이런 '변태 노인네'!

    아, 띄어쓰기만 잘못해도 사람은 아주 쉽게 음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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