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에게 영감 준 '팝아트 원조'가 왔다

    입력 : 2017.11.14 03:02

    아시아 첫 리처드 해밀턴 회고전
    가전제품·팝스타·정치범 소재로 대중소비사회 미래 예견한 작가

    "모든 예술은 평등하다. 기다란 선의 한쪽 끝엔 엘비스가, 반대쪽 끝엔 피카소가 있다. TV는 뉴욕 추상표현주의 못지않게 영향력을 발휘한다."

    영국 작가 리처드 해밀턴(1922~2011)은 피카소와 엘비스 사이 예술적 위계는 없다고 선언한 팝아트의 창시자다. 전후(戰後) 세계 화단을 지배하던 추상주의에 맞서 대중문화와 미디어가 쏟아내는 이미지를 차용해 소비사회의 욕망과 미래를 맹렬히 탐구한 해밀턴은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 등 유럽을 넘어 미국 팝아트에도 방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시아 첫 회고전 '연속적 강박'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개막했다. '시민(The Citizen)' '그녀(She)' '징벌하는 런던(Swingeing London)' 등 해밀턴 대표작 90점이 모였다.

    ◇토스터를 반복해 그리다

    "세잔이 생 빅투아르 산을 반복해서 그렸듯이, 해밀턴은 브라운사(社)의 토스터를 반복적으로 그렸어요. 디터 람스의 디자인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우리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도구로 토스터를 활용했죠."

    리타 도나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남편의 작품 ‘She’연작을 설명하고 있다.
    리타 도나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남편의 작품 ‘She’연작을 설명하고 있다. /이진한 기자
    은발을 가지런히 묶은 해밀턴 부인이자 작가인 리타 도나(78)는 남편의 작품 세계를 누구보다 쉽게 설명했다. "해밀턴은 토스터처럼 그 시대를 상징하는 가전제품, 팝스타, 정치범 같은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소비사회의 민낯, 미디어의 속성, 핵무기 같은 국제 정치 이슈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죠." 해밀턴은 '얼리어답터'이자 프린터를 직접 만드는 '메이커'이기도 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 엡손 프린터처럼 새 제품이 나오면 누구보다 먼저 사용해보고 작품에 곧바로 활용했으니까요. 해밀턴은 회화와 테크놀로지 모두 역사를 그리는 도구라고 생각했죠."

    ◇미디어의 왜곡된 이미지 들춰내

    마르셸 뒤샹을 신봉한 해밀턴은 회화만으로는 급변하는 현대인의 삶을 대변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자화상'·'그녀'·'스윈징 런던'·'꽃'·'7개의 방' 등 5개 연작은 해밀턴의 예술 궤적을 보여주는 대표작들이다. '스윈징 런던'은 롤링스톤스 멤버인 믹 재거와 아트 딜러 로버트 프레이저가 마약 혐의로 수갑이 채워져 끌려가는 사진을 회화, 판화, 콜라주 등으로 변주한 시리즈다. 양옥금 학예연구사는 "하나의 사건을 미디어가 어떻게 과도하게 묘사하는지, 이 왜곡된 이미지를 대중은 어떻게 소비하고 재생산하는지 탐구한 역작"이라고 설명했다.

    교도소에 수감된 북아일랜드 반군을 그린 작품 '시민(1981~83)'이 대표적이다.
    해밀턴은 앤디 워홀과 달리 정치 이슈도 다뤘다. 교도소에 수감된 북아일랜드 반군을 그린 작품 '시민(1981~83)'이 대표적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토스터가 등장하는 'She' 연작은 진공청소기, 냉장고 등 잡지 광고에 쏟아져 나오는 가전제품과 여배우의 사진을 조합해 대중 소비사회의 욕구, 현대 가정에서 여성의 변화를 주목한 작품이다.

    ◇냉장고부터 정치범까지

    1993년 베네치아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은 해밀턴은 생애 후반부로 가면서 정치 이슈도 과감히 다뤘다. 북아일랜드 반군 포로를 다룬 '시민(The Citizen)'은 유명하다. 예수처럼 보이는 화면 속 남자는 메이즈 교도소에 수감된 반군. 죄수복 입기를 거부한 채 담요를 뒤집어쓰고 배설물을 방치하는 '불결 투쟁'에 돌입한 이들을 BBC가 다큐로 제작한 것이 해밀턴을 자극했다. '그들은 과연 순교자일까?' 물음표를 던진 이 작품은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신화적 이미지에 메스를 들이댄다.

    마약 복용으로 체포된 롤링스톤스 멤버 믹 재거의 사진을 유화로 작업한 '스윈징 런던'(1968~69).
    마약 복용으로 체포된 롤링스톤스 멤버 믹 재거의 사진을 유화로 작업한 '스윈징 런던'(1968~69). /국립현대미술관
    해밀턴의 작품은 코를 바짝 대고 들여다봐야 한다. 같은 연작이라도 사진, 유화, 아크릴, 판화 등으로 기법을 달리해가며 미세한 차이를 두었기 때문이다. 볼수록 탄성이 나오는 이유는, 50년 전 작가가 예측한 현대사회의 오늘과 정확히 마주하는 까닭이다.

    리타 도나는 "강박과 집착으로 가득한 남편의 작품엔 부정적 평가가 많았지만 해밀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새로운 영감을 주는 사람들과 어울려 우리의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내년 1월 21일까지. (02)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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