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내가 만난 현대사의 거인들… 감히 그들을 말한다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 2017.11.11 03:01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평가는 역사가의 몫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살아있는 이도 있지만
    평가하는 기준은 제각각… 나름 느낀 바, 인상 묘사

    평생 일관해 온 철학
    보잘것없는 족보이지만 정직했던 부모의 후손
    월남민으로 독재에 항거… 자유·민주가 나의 기준

    편견 배제한 비판을
    이런 저런 고려하다 보면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어
    90 인생 살며 느낀 점… 너그러이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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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한국 대표 지성인이자 정치·시사평론가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김동길 인물 에세이―100년의 사람들'을 연재한다. 올해 구순(九旬)을 맞은 김 교수는 거의 1세기에 걸쳐 대통령부터 코미디언까지 수많은 한국인과 직접 교류해 왔다. 김 교수는 매주 이들을 한 명씩 소개하며 한국의 지난 100년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한평생 만난 사람들 가운데 한마디씩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이들을 골라서 내 의견을 짧게 적어 달라는 부탁을 예전부터 받아왔다. 도대체 내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볼 때 남기고 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그런 부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의 이력서'니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니 하는 제목의 글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내 생각에는 남길 필요 없는 이야기들이 태반인 것 같아서 그런 요청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에게는 누님이 한 분 계셨는데 대학 총장 자리를 18년이나 지켰다. 그가 아직 임기가 남아 있는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동생인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총장 노릇을 한 학교에서 20년 가까이 하다 보니 어떤 교수가 총장실을 찾아와 무슨 얘기를 하건 내가 다 아는 이야기일 뿐, 별로 신통한 이야기로 들리지가 않았다. 이런 지경에 왔으니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나는 누님의 그 말을 들으면서 총장 자리를 자진하여 물러나는 모습에 찬사를 보냈었다. 누님은 자서전을 쓰라는 요청을 거절하면서 이런 말도 했다. "과거를 돌이켜 보니 잘못한 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잘했다고 여겨지는 일들만 생각나니, 그런 일들을 적어서 남긴다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누님은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나도 남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을 살고 언젠가 그렇게 떠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인물평은 결국 역사가의 몫

    내가 100년 가까이 살면서 만나 본 사람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몇 사람을 골라 평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뭐라 해도 이미 세상 떠난 분들은 할 말이 없겠지만 아직 살아 있는 분 중에는 항의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가 나와 딴판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가까이 지낸 아무개 이야기는 왜 안 쓰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대답하기 곤란하지 않을까?

    나의 무례한 모습을 본 사람도 더러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한평생 예의를 지키며 살고자 노력했다. 선배나 후배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무례한 언행은 삼가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이 나이가 되어 가까이 알던 이들에게 실례되는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 않은가. 바보를 철학자로 잘못 볼 수도 있고 한심한 졸장부를 영웅호걸로 잘못 알 수도 있다. 그런 의견 차이 때문에 나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싶지는 않다. 인물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한 시대를 같이 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보다 넓은 시야에서 보고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하여 느낀 바 또는 받은 인상을, 그들의 사람됨을 솔직하게 묘사해 보겠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평가도 아직 제대로 하기 어렵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평이 매우 공정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아닌 것과 싸워온 한평생

    나의 조상은 대대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다. 나의 본관은 풍천(豊川)인데 그 성을 가지고 조선조에 벼슬을 한 사람이 꼭 한 분 계셨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족보를 가지고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영국 시인 토머스 그레이의 말을 빌린다면 "보잘것없이 단순한 이력밖에 없는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하면 족할 것이다. 내가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나의 부모가 정직하게 살아온 선량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매우 평범한 후손일 뿐이다.

    평범한 혈통에서 태어난 나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 90년을 살면서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방된 조국 땅에서 지적으로 성장한 셈인데 김일성이 주도하던 속칭 공산주의가 숙청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동족을 가둬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며 잔인하게 다루는 현실을 보고 평양을 탈출해 3·8선 이남으로 월남한 사람이다.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고 익히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철학은 자유 아닌 것, 민주주의 아닌 것과 맞서 싸우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서기 전에도 그러했고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그러했다. 6·25사변 때도, 9·28 수복 때도, 자유당이 장기 집권을 감행하던 때도, 군사 쿠데타가 벌어지던 때도, 18년 군사독재가 지속되던 때도 나의 철학과 가치관은 한결같이 자유를 숭상하고 독재를 미워하는 입장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대학교수라는 신분에 유신헌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군사재판도 받고 징역 15년에 자격 정지 15년이라는 엄청난 형벌을 받기도 했다. 그런 정권을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믿고 항소를 포기하고 안양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특별사면으로 출옥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 가치 판단의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즉 나의 인물평은 한결같이 민주적 시대정신에 입각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편견으로 비판하지는 않겠다

    대통령 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당선되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해도 내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볼 때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5년 동안 한 번도 그 이름 뒤에 대통령이라고 붙여서 불러본 적이 없다. 상식에 벗어난 일이라고 탓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 만난 사람들을 두고 무슨 소리를 어떻게 하게 될지 나 자신도 잘 모른다. 그러나 원칙 한 가지는 있다. 그가 살아 있건 이미 저세상에 갔건 편견 어린 비판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인물을 골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미리 무슨 말을 하기도 어렵다. 10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아는 이가 많을 것이라는 신문사의 추측은 틀리지 않지만 깊이 있게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친숙한 사람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어찌 생각하면 노인이 기억을 더듬어 우리 사회에 조그마한 공헌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기가 어렵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엇갈린 의견이 있을 수 없지만 태종이나 세조에 대하여는 상반된 견해가 나올 수도 있다. 일제하 역사를 놓고도 안중근이나 이봉창이나 윤봉길 같은 의사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없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엉뚱하게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평하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에 대해서도 무슨 말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내 입장도 그렇지만 신문사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다. 예컨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이나 노태우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많다. 김대중에 대한 견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잘못한 일을 난들 왜 모르고 지냈겠는가? 그러나 지구 상 어떤 인물도 잘못한 일만 들추어내면 잘한 일은 단 한 가지도 밝혀내기 어렵다. 어떤 인물이 잘못한 일들을 지적해 달라고 하면 글 쓸 용기가 나지 않지만 내가 익히 아는 잘한 일들을 열거해 달라고 하면 응할 준비가 돼 있다. 고려 말 선비 이색이 어지러운 세태를 바라보며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하고 탄식한 바 있는데 나의 심경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하노라면 한 줄의 글도 쓰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틈바구니에서라도 자기 의견을 털어놓고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것이 배운 사람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백년 가까이 살고 보니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중에 오늘도 매우 그리운 이들이 있고, 아직 살아 있어도 만나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인간관계에도 '궁합'이 있어 맞는 사람이 있고 안 맞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남들도 다 좋아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세상이 다 싫어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사이에 어떤 넘지 못할 담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말을 구구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90이 되기까지 살고 보니 인생사가 모두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는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너그럽게 읽어주시기를 감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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