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잠수부 박명호(52·사진)씨는 아침 6시면 동해안 북단 항구 대진항에서 배를 몰고 나간다. 장남 철준(27)씨가 운전하는 배의 이름은 북녘 고향을 따서 '청진호'라고 붙였다. 잠수복과 투구, 신발과 납으로 만든 추까지 60㎏에 이르는 장비를 갖추고 해저 30m에 내려가 하루 대여섯 시간씩 해산물을 잡아올린다. 150m 길이의 공기 호스가 그의 유일한 생명줄이다.

박씨는 기자와 만난 8일에도 문어와 우럭, 해삼, 홍합, 소라, 성게 등을 배 한가득 싣고 돌아왔다. 풍랑주의보가 없으면 토요일 하루만 쉬고 매주 6일씩 일한다. 박씨는 "몸이 성치 않거나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오늘 일 나가지 않으면 내일 집에 먹을 쌀이 없다'는 것이 내 좌우명"이라고 했다.

그런 박씨가 최근 다큐멘터리 주인공이 됐다. 지난 2일 개봉한 '올드 마린보이'(감독 진모영)에 일가족과 함께 출연했다. 진 감독은 2014년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로 480만 관객을 모으며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흥행사를 새로 썼다. 그해부터 3년간 박씨를 따라다니면서 수중(水中)과 일상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씨는 "'다큐멘터리는 내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 감독님 말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박씨는 2006년 5월 아내 김순희(50)씨, 두 아들 철준·철훈(24)씨와 함께 황해도 옹진에서 인천으로 내려왔다. 중국산 경운기 엔진을 배의 동력으로 삼았고, 스크루는 직접 망치로 때려 만들었다. 북의 삼엄한 경계를 피해야 하는 해상에서는 박씨가 노를 저었고, 아내는 뱃머리에서 망을 봤다. 장남 철준씨는 배 바닥에 고인 물을 퍼냈고, 당시 13세였던 막내 철훈은 무서워할까 봐 술 먹여 재웠다. 박씨는 "태어나서 처음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박씨는 17세 때 인민군에 입대해서 20년간 군 생활을 했다. 아침마다 "미제(美帝)와 남조선 괴뢰 도당을 소멸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지금은 "배를 빠르게 몰면 1분이면 북한에 간다"는 남한 최북단 마을에 정착했다. 박씨는 "북의 흥망성쇠를 겪은 뒤 '두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내려가야 한다'는 최종 결론에 이르렀다. 결심한 뒤에도 온 가족이 합의할 때까지 6~7년 걸렸다"고 했다.

그는 북에서 군 복무하는 동안 잠수를 배웠다. 1990년대 극심한 식량난으로 수십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그는 "군부대도 쌀만 공급이 겨우 되고, 소금 공급도 힘들어서 보양소마다 영양실조로 누워 있는 병사가 수두룩했다. 이 때문에 '부대마다 직접 농사를 지어 부식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했다. 함경남도 이원군의 부대 중대장이었던 그는 쪽배를 만들어 병사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 해산물을 잡았다. 박씨는 "남한에 가서 먹고살 방편이 마땅치 않을 때를 대비해 '히든 카드'로 꼭 쥐고 있었다"고 했다.

남한에서 잠수부 생활도 10년째를 맞았다. 대진항에서 많을 때는 30명이 잠수부로 활동했지만 지금은 7명 남았다. 박씨는 "수협(水協) 보험 외에는 보험 가입도 힘들 만큼 위험한 직종"이라며 "쉬지 않고 일했지만 지금도 잠수가 두렵다"고 했다. 그는 "바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흔히 '저승 가서 벌어다가 이승 와서 쓴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셈"이라고 했다. 억세고 투박한 말투에서 강한 자부심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