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그날 비닐窓에 '퍽!퍽!' 부딪히는 소리… 새들이 떨어져 죽어있었다"

    입력 : 2017.11.06 03:02 | 수정 : 2017.11.07 11:03

    [연구사 남편과 함께 '北 풍계리 핵실험장'에 거주… 여성 탈북 작가 김평강씨]

    "염증을 소금물로 소독하고 돼지고기 비계 녹여 바르고 남편은 일터로 나갔다
    나이 마흔에 이가 다 빠졌다"

    "나는 1차 핵실험 있은 뒤 혈변 보고 고열로 드러누워 40일간 혼수상태 빠졌다
    길주郡에 이런 증세 퍼져…"

    김평강(53)씨는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의 위수구역 안에서 살았던 거의 유일한 탈북자다. 풍계리는 북한이 6차례 핵실험을 실시한 장소다. 남편이 국방과학원 연구사로 이곳에서 근무했다. 이 때문에 2009년 그녀의 탈북 과정에 국내 정보기관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김평강'은 가명(假名)이다.

    "한국에 와서 편안하게 살고 싶어 이메일 아이디를 '평강'이라고 했다. 출판사에 메일로 원고를 보내고 이름을 밝히지 않으니 출판사에서 '평강' '평강' 불렸는데 그게 가명이 됐다."

    김평강씨
    김평강씨는“한국은 자유롭지만 부자유가 있다. 좌우 진영이 나뉘어 어떤 의견을 표시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신변 노출을 막기 위해 옆모습 촬영. /최보식 기자
    몇 달 전 그녀는 '풍계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 세간에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녀의 부모는 북한인명사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장성택과 김일성종합대 동창이었고, 망명한 고(故) 황장엽과도 친분이 각별했다. 오빠와 언니는 북한의 공공기관에서 현재 근무하고 있다.

    최근 외신(外信)에서는 "한 번만 더 핵실험 하면 산 정상이 붕괴돼 지하 방사능오염 물질이 대기 중으로 분출될 것" "6차 핵실험 뒤 지하 갱도에서 대규모 붕괴 사고가 일어나 200여 명 사망 가능성"을 보도하고 있지만, 그녀가 처음 풍계리를 갔을 때는 이런 뉴스와 무관한 곳이었다. 1978년 열네 살 때였다.

    "당시 인민군출판사 기자였던 아버지는 군부대 교방(교체)과 관련된 취재를 위해 풍계리에 가면서 가족을 동반했다. 울창한 수림(樹林) 속으로 들어가면 하늘이 안 보였다. 산기슭에는 큰 바위들이 고래 등 같은 모양을 하고 두 줄로 띠를 두른 듯 펼쳐 있었다. 풍계리는 송이버섯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맨발 아래 밟히던 송이의 부드러운 촉감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가 돌판 위에 송이를 구울 때 나던 향긋한 내음과 눈을 아리게 하던 연기의 기억이 생생하다."

    고교 시절 그녀는 평양의 대성산 혁명열사릉에서 '청소년 백두산상(賞)' 글짓기 경연에서 우승했다. '평양연극영화대 창작학부에 공부시키라'는 김정일 친필 말씀이 전달됐다. 당초 김일성대 생물학부를 지원하려 했던 그녀의 행로가 바뀌었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조선중앙방송위원회 학생소년부에서 작가로 근무했다.

    풍계리와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은 1989년 스물다섯 살 때다. 그녀는 '방송 제작을 위해 출장 간다'고 집에 거짓말하고는 풍계리에 갔다. 사랑하는 남자가 풍계리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큰오빠의 친구로 평성이과대학을 나왔다. 훤칠한 키의 미남자였다.

    "그때 사랑에 빠졌다. 그 나이에는 무(無)지식이어서 바다나 절해고도에 떨어져도 괜찮다는 심정이었다. 풍계리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나왔다."

    ―평양에서 풍계리까지는 어떻게 가는가?

    "평양~혜산 간 열차를 타고 길주역에서 갈아탄다. 거기서 정거장 4개를 더 가면 풍계리읍 소재인 재덕역(驛)이다. 총 18시간쯤 걸린다. 열차가 지체돼 며칠씩 걸리기도 했다. 나는 군부대 차량을 타고 많이 들어갔다. 평양에서 하루 반이나 사흘 걸렸다."

    혼인신고를 했던 그해 겨울, 그녀는 남편의 입원 소식을 받았다. 풍계리 위수구역으로 들어가니 안내자가 아주 깊은 산골의 컨테이너 진료소로 데려다줬다. 폭설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그때 남편은 '사고로 피부가 벗겨지고 간(肝)이 좀 굳어졌지만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방사능 피폭(被曝)'이라는 얘기를 안 했다. 우리 부모님은 뭔가 낌새를 챘는지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내 뜻을 꺾지는 못했다. 2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 생활은 풍계리에서 했나?

    "평양시 외곽에 국방과학원 거주 단지에서 지냈다. 보름에 한 번씩 식량 배급이 잘 나왔다. 남편은 풍계리를 오가며 생활했다. 어떨 때는 풍계리에서 반년 만에 나오곤 했다. 나는 1991년 봄 풍계리에 들어가 석 달을 함께 살았다."

    ―아버지와 처음 갔을 때보다 풍계리는 어떻게 달라져 있었나?

    "군인과 과학자들 사이에서 '미사일 기지'를 만든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탱크와 고사포들이 옮겨졌다. 그 아름다운 곳에서 '핵실험장'이 지어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1980년대 말부터 송이를 채취해 일본 상인들에게 넘겨 생활하던 원주민들이 인근 온성, 종성, 평륙, 대동 등으로 강제 이주됐다."

    ―풍계리에는 주민이 얼마나 거주하고 있었나?

    "기차역 주변으로 삼십 가호 정도 있었다. 여기서 핵실험장까지 30㎞쯤 떨어져 있었다. 민간인은 출입 통제됐다. 기차를 타고 올 경우 재덕역에서 내려 통나무나 군수물자를 실어 오르내리는 트럭이나 간부 차량 등을 타고 위수구역으로 들어갔다."

    ―당시 주민들도 '핵실험장'이라고 불렀나?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군부대'라고 불렀다."

    ―당신은 풍계리 핵실험장 안에서 어디서 거처했나?

    "위수구역 안에 과학연구사를 위한 임시 귀틀집 4채가 있었다. 다른 연구사 세 가구가 이미 살고 있었다. 연구사들은 여기서 30㎞ 떨어진 연구실까지 '갱생'이라는 지프를 타고 출퇴근했다."

    ―풍계리에서 그 뒤로 쭉 살았나?

    "1991년부터 들락날락했다. 풍계리에서의 생활 기간을 다 합치면 3년쯤 될 것이다."

    ―2006년 10월 9일 1차 북핵 실험 때는?

    "풍계리에 있었다. 그날 굉음이 들렸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구가 흔들렸다. 갱도 공사를 하면서 암반 발파 작업이 늘 있었기에 특별하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나?

    "그날 갑자기 비닐 박막을 댄 창문에 '퍽! 퍽!'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참새와 까치, 양진이 같은 새들이 떨어져 죽어 있었다. 너무 놀랐다. 풍계천에는 수많은 물고기가 하얀 배를 드러내고 떠내려갔다."

    ―그래서 '핵실험'이라는 걸 알았다는 건가?

    "핵실험이 있었다는 걸 거기서는 몰랐다. 한국에 와서 핵폭발 때 발생하는 전자파로 그렇게 됐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날짜를 유추해본 것이다."

    ―미국 언론에서도 '풍계리 방사능 오염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1차 핵실험 때는 그런 조짐이 있었나?

    "내가 겪었다. 혈변을 싸고 고열로 드러누웠다. 40일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길주군 주민들에게 갑자기 이런 증세가 퍼졌다. 풍계리의 특산품인 송이버섯과 칠색송어는 김일성에게 선물로 진상돼 왔지만 핵실험장이 들어서면서 그 목록에서 빠졌다."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의 증세는 어떠했나?

    "그때만 해도 방사능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염증을 소금물로 소독하고 일터로 나가곤 했다. 진료소에서 주는 술파다이어졸 가루는 바르면 바를수록 상처가 더 벗겨지는 것 같았다. 돼지고기 비계를 녹여서 바르고, 도라지 가루를 찧어 물에 갠 연고를 사용하기도 했다. 피부가 한 벌 벗겨진 이후로 새로 돋아난 피부에 가려움증이 생겨 자주 긁더니 엷은 부위에는 욕창이 생겼다. 간경화와 신장염으로 얼굴이 부어올랐다. 신장 기능 마비로 이불에 오줌도 쌌다. 남편은 환각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병원 치료를 받지 못했나?

    "그 구역을 벗어나 외부 병원에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며 가려움증을 견뎌냈다. 한창 심할 때는 몸에서 비늘 같은 게 후두두 떨어졌다. 욕창으로 살이 썩어 내리고 있었고, 엉덩이뼈는 드러날 정도였다. 나이 마흔에 이가 다 빠졌다."

    ―그런데도 풍계리를 떠날 때까지 그곳이 '핵실험장'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인가?

    "어느 날 북한 라디오 방송에서 '미제와 남조선 괴뢰당국이 있지도 않은 핵을 가지고 우리를 위협한다'라고 나오자, 남편은 '있지도 않다고? 내가 만들고 있는데…'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어렴풋이 짐작했다."

    ―북한의 핵무기는 거의 완성 단계로 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서 얻은 실패 경험과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고난의 행군'(1990년대 중반) 당시 정말 어려웠다. 굶어 죽는 사람을 내 눈으로도 봤지만, 나도 못 먹어서 도와줄 기력이 없었다. 당시 북한의 배운 사람들은 '이 나라(북한)가 얼른 망했으면 좋겠다'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대로 뒀으면 독재 체제는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의 손을 잡고 구해줬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과 교류 협력이 잘못됐다고 보나?

    "그런 과오가 되풀이돼선 안 된다. 평화가 소중하지만, 소나기 오기 전 후덥지근한 날씨 속에서 계속 지내는 것을 '평화'로 말할 수 있나. 우리만의 평화를 위해서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을 내버려둬서도 안 된다."

    ―북한 정권과 분리해 북한 주민을 돕는 게 '인도주의' 원칙이지 않는가?

    "북한은 인도적인 민간 지원까지 이용해 핵개발을 추진했다. 북한 정권의 허락을 받고 그를 통해서 북한 주민을 돕는다는 것은 호랑이에게 고기를 맡기는 격이다. 우리 정부가 민간 차원의 지원에 대해 '북한 주민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말았으면 한다."

    ―어떻게 하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나?

    "그동안의 대북 제재에서 북한은 군사 강국 목표를 매진해왔다. 바깥에서는 북한의 생리와 성격을 잘 모른다. 북한은 항상 국제사회의 정세 분석이나 상상을 뛰어넘었고 이를 교란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은 상당히 먹혀들 것으로 본다."

    ―막상 한국 사회에서 살아보니 어떤가?

    "나는 한국을 '자유로운 부자유(不自由)'라고 말한다. 좌우(左右) 진영이 나뉘어 대립돼 어떤 의견을 자유롭게 표시하는 게 어렵다. 처음에는 이런 한국 사회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북한은 반대 세력을 '종파분자'로 몰아 숙청했고 북한 인민을 하나의 노동당에 묶어 세뇌시켰다. 북한은 쇄국 정치로 봉건국가를 만들었다. 이런 북한과 대비하면 한국의 정치 노선 대립이 더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때론 너무 심하다. 어떤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고 개인의 사생활까지 침해하고 공격한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데도 법정(法廷)으로 끌고 가는 것도 보았다."

    그녀는 2009년 탈북해 한국으로 들어왔고, 남편은 그해 북한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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