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역사라는 게 이렇게 초라한 것인가

    입력 : 2017.11.03 03:17

    내 귀에는 이런 말이 부쩍 많이 들린다
    "몇 년 뒤에 보자, 지금 당한 것 그대로 똑같이 해줄 테니까"
    어리석은 말이지만…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도 여론을 듣겠지만, 내 귀에는 이런 말이 부쩍 많이 들린다. "몇 년 뒤에 보자. 지금 당한 것 그대로 똑같이 해줄 테니까."

    딱하고 어리석은 말이다. 하지만 정권이 한번 바뀌었다고 이렇게 단기간에 과거 정권 인사들이 굴비 엮이듯 소환되고 구속된 적은 없었다. 횟수가 잦고 반복되니 '한줄 뉴스'도 안 될 정도다. 보수 정권이 어설프고 무능했는지 모르나 그전의 진보 정권과 비교해 고만고만하지 훨씬 더 부패했다고 보지 않는다. 무엇보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 핵심 참모, 장차관, 삼성의 젊은 오너까지 구속된 뒤다. 그럼에도 현 정권 담당자들은 배부르지 않은 모양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통과의례처럼 한바탕 청소는 해왔다. 본보기로 과거 인물 몇 명을 금품 수수나 횡령 등 개인 비리로 손을 봤던 게 사실이다. 지금은 보수 정권이 다시 못 나오게 아예 씨를 말리겠다고 작심한 것으로 비친다. 정말 '혁명(革命)'을 하는 것처럼 청와대 캐비닛 문건을 뒤지고 국정원 메인 서버까지 열었다.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마다 '적폐 청산' 실적을 올리기 위해 스스로 과거의 행적을 고백하고 있다.

    현 정권은 필요한 타이밍마다 과거 청와대나 국정원의 문건을 언론에 흘린다. 정말 탁월한 언론 감각과 홍보 역량이다. 그렇게 보도된 문건만 보면 보수 정권은 몰래 음모나 기획하고 불법적인 지시만 일삼는 집단이다. 이 때문에 보수 정권에서 일했거나 협력한 것은 '부역 행위'처럼 됐고, 현 정권과 다른 정치적 입장과 이념은 적폐 대상으로 몰리고 있다. 보수 정권에서 추진했던 핵심 정책과 사업마다 관련자들을 찍어내고 있다. 터럭을 불어 헤쳐 그 속의 허물을 찾듯이 하며 법 규정 위반 사례를 들이대면 꼼짝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 국회 본회의 상정에 따른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권을 잡으려는 것은 자신들이 옳다는 방향으로 나라를 끌고 가기 위해서다. 정권마다 그런 목표 달성을 추구해왔고 업적을 이루려고 했다. 이를 위해 대통령의 통치 행위가 있고, 검찰·국정원·국세청 등 권력기관이나 간혹 대기업까지 동원되는 것이다. 보수 정권은 그 나름대로 자신이 옳다는 보수 가치와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편법과 변칙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편법과 변칙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진보 정권 시절에도 써왔고, 아마 현 정권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권력의 속성이고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보수 정권에서 자기 성향에 맞는 인사들을 골라 쓰고 우파 단체를 편법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비판받아야 할 일이지만, 현 정권에서 코드 인사를 하고 좌파 단체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보수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봤다는 예술인과 대중문화인들이 들고일어났지만, 현 정권 들어서는 종편 TV에 나와 떠들어대던 소위 우파 성향의 정치 평론가들이 대거 물갈이됐다. 현 정치세력에 의해 찍혔다고 보면 된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권력도 투명하거나 순수할 수가 없다. 이런 권력의 세상을 알면 지난 정권 전체를 '적폐'로 몰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법(法)의 경계선에서 너무 멀리 벗어났거나 개인 착복 비리에 대해서만 칼을 들이댔다. 지금은 정권의 국정 방침에 따라 제도와 직책에서 관행적으로 해왔던 업무 행위까지 심판대에 세우고 있는 것이다.

    한 국정원 전직 간부는 당시 정국 안정을 위해 좌파 성향의 유언비어와 선동 글을 막는 것도 직무에 속했다. 그는 댓글 외곽팀과 보수 단체에 국정원 예산 10억원을 지원해 '국고손실죄' 죄목으로 구속됐다. 문 대통령이 건설 중이던 신고리 5·6호 원전을 법적 근거도 없이 중단시켜 1000억원 이상을 날렸다. 이런 경우에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 정권은 그런 국정원 간부의 적폐와는 '클래스'가 다르다고 보는 것 같다. 과연 1000억원 이상 공중에 날려버린 자신들의 행위는 '정의'이며 '공공선'을 위한 것이라고 홍보했다.

    1995년 서울 명일동의 작은 아파트에 살던 수수깡처럼 마른 노년의 시인 김춘수(金春洙)와의 만남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연애 시 구절로만 알 것이다. 그는 평생 시류(時流)와 무관한 '무의미(無意味)'의 시를 썼다. 5공 정권이 시인을 데려가 전국구 의원 자리를 줬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는 하는 일 없이 4년을 보낸 뒤 대학에 되돌아갔다.

    "학생들이 '어용학자 물러가라'며 강의를 못 하도록 방해했어요. '왜 그러느냐'고 묻자, '역사에 반동(反動)을 했다'는 것이었어요. 깜짝 놀랐어요. 순간 느낀 것이 '역사라는 게 이렇게 초라한 것인가'였습니다. 저런 애들이 역사를 만드는구나. 불과 몇 명이었지만 제자로부터 그런 말 듣고는 더 이상 교단에 설 자신이 없어 사표를 냈어요."

    좋은 말을 너무 자주 외치면 그걸 이용하는 무리가 생긴다. 문 대통령도 이 뜻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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