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라이벌은 백남준·이우환… 이젠 소중한 추억이죠"

    입력 : 2017.10.31 03:02

    [88세 '물방울 화가' 김창열 화백, 제주서 '그의 친구들 7080' 展]

    김창열미술관 개관 1주년 맞아 박서보·이우환·정상화 등 전시
    "스님 염불 외듯, 물방울 그려요"

    88세 화가는 바위처럼 앉아 캔버스를 응시했다. 어눌한 말투였지만 그는 기자의 우문(愚問)을 한 줄 현답(賢答)으로 받아냈다. "40년을 물방울만 그리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다른 건 그릴 줄 모르니까요." "시계를 돌릴 수 있다면 어느 때로 가고 싶습니까?" "지금…. 살 만큼 살았고, 손자도 보았고, 괜찮은 화가란 소리도 들었고요." "큰 고비 없이 명성을 이어온 비결이 뭘까요?" "사람들이 나를 좋게만 얘기해주어서(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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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평창동 작업실에서 만난 김창열 화백에게 라이벌이 누구냐 묻자“백남준, 이우환”이라며 웃었다. “짓궂은 천재들이었죠.”후배 작가들에게는“1만권의 책을 읽고, 멀리 여행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다음 달 24일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받는다. /고운호 기자
    물방울 하나로 세계 화단에 이름을 떨친 한국 현대미술사의 거목 김창열 화백이 동시대 고락(苦樂)을 함께했던 7명의 '친구들'과 전시를 한다.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개관 1주년을 맞아 내년 1월 31일까지 열리는 '김창열과 그의 친구들 7080'전. 백남준·박서보·윤형근·이우환·정상화·정창섭·하종현의 70·80년대 작품들이 김창열의 물방울과 나란히 걸린다.

    제주와의 인연은 6·25전쟁으로 맺었다. 피란와 1년6개월을 살았다. 미술관을 열 때 김창열은 썼다. '나는 맹산(평안북도)이라는 심심산골에서 태어나 용케도 호랑이한테 잡아먹히지도 않고 여기 산천이 수려한 제주도까지 당도했습니다. 상어한테 잡아먹히지만 않으면 제주도에서 여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전쟁의 상흔은 김창열 물방울의 출발이었다. "중학교 동기 120명 중 60명이 죽었어요. 나이가 많아야 스물?" 뉴욕을 거쳐 파리에 정착해 바람 숭숭 들고 들고양이 드나드는 '마구간 작업실'에서 처음 물방울 그림이 태어났다.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캔버스 가득 물을 뿌려놨는데, 이튿날 보니 아침 햇살에 비친 물방울이 눈을 사로잡았죠."

    정상화의 1972년작‘G-3’. 캔버스에 유채.
    정상화의 1972년작‘G-3’. 캔버스에 유채.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
    1972년 세상에 내놓은 물방울은 캔버스에서 신문지로, 모래에서 나무판으로 옮겨가며 무수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천자문 위에 그린 물방울 연작 '회귀'에는 대동강변 고향의 추억이 맺혀 있다. "명필(名筆)로 비석 글씨 쓰시던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웠어요. '동그라미를 어쩌면 그리 잘 그리느냐' 칭찬하시니 신이 나서 신문지가 새까매질 때까지 글씨를 썼지요."

    전쟁의 기억은 평생의 스승 이쾌대(1913~1965)를 불러와 노장(老匠)을 오열하게 했다. 한국의 미켈란젤로라 불릴 만큼 천재였으나 이데올로기 소용돌이에 휘말려 월북했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비운의 화가. "이탈리아 작가 조르조 데 키리코와 똑같이 생기셨죠. 코는 오뚝하고 눈은 쑥 들어가고. 선생님께 배우려고 화구통 손에 쥐고 찾아갔는데 한눈에도 굉장한 인격자인 걸 알았어요. '우리 누가 움직이지 않고 하루종일 그림 그리나 내기해' 하실 만큼 성실했던 분. 근데 세상을 잘못 만나서…." 물방울은 그런 아픔과 그리움들을 달랬다. 김창열은 "스님이 염불 외듯, 농부가 밭에다 씨 뿌려 수확하듯" 물방울을 그린다고 했다.

    2004년 프랑스 국립 주드폼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연 뒤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올랐지만 김창열은 변함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 세 시간 그림을 그린다. "눈 뜨면 아령 들고 땀이 쪽쪽 날 정도로 운동한 뒤 그려요. 아무 색깔도, 모양도 없는 세계를 그리다 보니 미친놈처럼 된 것 같아요(웃음)."

    백남준·이우환 등 당대를 호령한 '친구'들과의 일화로 웃음이 터졌다. "뉴욕 시절 김환기 선생이 백남준과 날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백남준이 밥 먹는 내내 함께 온 여자 친구 목덜미를 쓰다듬어요. 속으로 '저 사람은 바보인가?' 했는데 나중 보니 천재더군요." 괴짜스럽긴 김창열도 못지않았다. "정상화의 부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 마누라 바꾸자!' 했지요, 하하!" 파리 시절 이우환이 작품에 쓸 돌을 함께 찾으러 독일 국경을 넘은 이야기는 큰며느리 김지인씨가 들려줬다. "'돌 찾아올게' 하고 나가더니 몇날 며칠 연락이 없어 어머님 졸도하기 직전인데, 자동차 가득 돌을 싣고 두 분이 신이 나서 들어오시더래요."

    붓을 놓은 시간엔 노자의 '도덕경'을 베껴 쓴다는 김창열에게 3년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심사에 떨어진 것이 섭섭하지 않으냐 물었다. "난 충분히 명예를 누린 사람이에요. 지금은 죽어서 사는 거나 마찬가지. 가끔 파리가 그리워요. 가난했으나 내가 살아 꿈틀거렸던 그 시절 파리…." (064)-710-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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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세 '물방울 화가' 김창열 화백은 어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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