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거도 서쪽 40해리(약 74㎞) 해상에서 조업 중인 중국 어선 40여척 발견. 단속 실시 예정. 특수기동대원, 전원 집합!"

15일 오전 11시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경비함인 3015함(3000t급)에 탄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뱃멀미 때문에 여경 선실 2층 침대 아래 칸에 누워 있었는데 긴급 방송이 나왔다. 지난 6월 다시 독립조직이 된 해경은 요즘 무허가 조업, 허가를 받았더라도 어획량을 지키지 않고 치어까지 쓸어가는 조업을 단속하고 있다. 기자도 2박3일간의 일정으로 동행 취재에 나섰다.

◇중국 어선 올라타자 식은땀이…

방송을 듣고 조타실 옆 갑판으로 올라가니 대원들이 검은색 진압복을 입고 모여 있었다. 각자 방탄조끼에 K-5 권총과 곤봉, 섬광폭음탄, 채증용 카메라를 장착한 상태였다. 기자도 검은색 방탄조끼와 헬멧, 팔꿈치와 무릎 보호대를 건네받았다. 헬멧을 쓰니 정수리가 지끈거렸다. 방탄조끼는 책가방 2~3개를 멘 것처럼 무거웠다.

중국 어선으로 신속 접근 - 지난 15일 전남 가거도에서 서쪽으로 70여㎞ 떨어진 바다에서 서해지방해경청 3015 경비함 소속 고속단정이 중국 어선으로 접근하고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내달린 해경 특수기동대원들은 어선에 올라 선장과 선원들을 통제하고, 조업 규정 위반을 적발했다.

고속단정에 올라타자 중국 어선 서너 척이 눈에 들어왔다. 고속단정은 그중 한 척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파고(波高)는 2~3m였다. 바닷물이 얼굴에 튀어 눈을 뜨기 힘들었다. 잠시 후 길이가 10m쯤 되는 낡은 목선이 보였다. 팀장 정승현(35) 경사가 해경 깃발을 흔들며 중국어로 말했다. "팅처(停車·정지)! 팅처!" 정학주(32) 경사는 기자에게 "이제부터 정신 차려야 된다"고 했다.

배세영(34) 순경이 고속단정에서 중국 어선으로 뛰어오르며 중국인 선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창(魚艙·어선에 있는 어획물 저장고)을 열어라!" 통역을 맡은 고영범(31) 순경이 이를 "다카이 위 창(打開魚艙)!"이라고 중국어로 옮겼다. 대원들과 함께 고속단정에서 중국 어선으로 건너갔다. 어선은 오뚝이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중심을 잡고 서 있기가 힘들었다. 낡은 갑판엔 손질하다 만 조기·갈치 대가리가 뒹굴고, 생선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중국인 선원 9명이 꼼짝 않고 서서 우리를 노려봤다. 선원 두세 명은 쇠꼬챙이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식은땀이 났다. 대원 7명이 선원들을 선수 쪽으로 몰고 바다 쪽으로 돌아서라고 했다. 금창용(23) 순경이 "선원들이 흉기로 뒤에서 공격하는 경우가 있어서 바다 쪽을 보라고 명령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획량 0' 배 안엔 조기 가득

정승현 경사가 선장이 있는 조타실을 장악했다. 정 경사는 장부를 확인한 다음 "어획량이 '0㎏'으로 적혀 있으니 어획물이 하나라도 나오면 불법"이라고 했다. 대원들이 본격적으로 어선 수색을 시작했다. 중국 대련선적에 소속된 이 '랴오좡위'호는 우리 정부의 허가를 받고 조업하는 배였다. 한국과 중국은 양국 EEZ(배타적경제수역) 일부를 잠정조치수역으로 정하고 상대국 EEZ에서 조업할 수 있도록 하는 한·중 어업협정을 맺고 있다. 우리 측 해역에서 조업하는 중국 어선의 연간 할당량은 그물의 종류에 따라 척당 11~30t을 넘을 수 없다. 연간 어획 할당량을 초과하면 조업을 더 할 수 없다. 하지만 고의로 어획량 기록을 줄이며 고기를 더 잡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불법 조업해 숨겨 놓은 참조기 - 중국 어선‘랴오좡위’호 선장(오른쪽) 등이 어창(魚艙)에 숨겼던 참조기를 꺼내자 해경 대원이 증거 사진을 찍는 모습.

한 선원이 두꺼운 나무로 된 어창 문을 걷었다. 약 2m 깊이의 어창엔 얼음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또 다른 선원이 철제 사다리를 놓고 어창 아래로 들어가 상자를 하나씩 끄집어냈다. 참조기와 갈치를 담은 상자가 쏟아져 나왔다. 적어도 200개는 되는 것 같았다. 장부 확인과 어획물 확인, 채증 작업이 이어졌다. 배가 계속 흔들려 헛구역질이 났다. 대원 한 명이 무전으로 "조업일지에 어획량을 축소하고 조업한 혐의가 있다"고 경비함에 보고했다. 이영주(54) 함장이 "어선을 나포하고 선장과 선원 2명을 3015함에 불러 조사하라"고 답신을 보냈다. 기자는 2시간쯤 지나고 나서 선장과 선원 1명을 태운 고속단정을 타고 3015함으로 돌아왔다. 화장실로 직행해 세 번 속을 비워야 했다.

◇자위권 발동해도 안심 못해

본지 이슬비 기자(맨 오른쪽)가 15일 중국 어선 랴오좡위호에서 어창(魚艙)을 내려다 보고 있다.

[중국 어선들 한국 EEZ'싹쓸이 원정']

해경은 곧바로 중국 어선의 선장을 조타실로 데리고 가서 조사를 했다. 선장 판모(39)씨는 "다른 배에서 조업한 고기를 보관만 했다" "중국에서 잡아 가지고 온 고기"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선원들의 진술과 증거 자료를 보자 규정 위반을 했다고 시인했다. 중국 대련에서 출항한 '랴오좡위'호는 지난 8일부터 우리 해역에서 조업을 하면서 하루 3100여㎏씩 조기를 잡고도 600㎏만 잡았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광주지검 목포지청은 15일 중국 대련선적에 담보금 1500만원을 내라고 결정했다. 외국 선주(船主)는 담보금을 내야 우리 해역에서 불법 조업을 하다 나포돼 법원에 압수된 선박·화물 등을 돌려받을 수 있다. 판 선장과 선원은 경비함에 억류됐다가 담보금이 들어온 것이 확인된 16일 낮 12시쯤 풀려났다.

해경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제대로 인명을 구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체돼 국민안전처에 흡수됐다. 해경의 위상이 약해지면서 중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이 기승을 부렸다. 작년 10월엔 해경 고속단정이 중국 불법 조업 어선들의 집단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사고까지 벌어졌다. 해경은 단속에 맞서는 불법 조업 외국 어선에 공용화기(共用火器)로 자위권을 발동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극렬 저항하는 중국 어선들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죽창·쇠꼬챙이로 덤비는 어선들이 여전히 있다고 한다.

기자와 같은 방을 썼던 박희숙(여·35) 경장은 "우리끼리는 솔직히 '중국 어선 단속 너무 가기 싫다.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해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바다는 물러설 곳이 없잖아요. 묵묵히 이겨내는 수밖에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