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씨앗을 뿌리는 것… 씨 안 뿌리면 나무도 없어"

    입력 : 2017.10.16 03:03

    [무료 저녁 급식소 '안나의 집' 20년… 조리사 모자와 청바지 차림 '이탈리아 신부' 김하종]

    "추석 연휴 내내 문 열었어요, 갈 데 없는 사람들 왔어요
    다른 날보다 두 배 먹었어요, 정말 보람 많이 느꼈어요"

    "550명분 미역국 만듭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주방장께서 시키면 합니다, 저는 보조예요"

    경기도 성남시 성남동성당(聖堂)의 부속건물인 '안나의 집'에 내가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10분이었다. 김하종(60) 신부는 자기 키만 한 나무 주걱을 들고 큰 솥에 담긴 쇠고기 미역국을 젓고 있었다. 사제 복장이 아니라 조리사 모자와 청바지에 앞치마를 둘렀다. 열 명 남짓한 자원봉사자들은 앉아서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김하종 신부는“불쌍해서 돕는 게 아니라 인생에서 한번 넘어진 형제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손잡아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하종 신부는“불쌍해서 돕는 게 아니라 인생에서 한번 넘어진 형제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손잡아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550명분 미역국 만듭니다. 주방장께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키면 합니다. 저는 보조예요. 일요일 빼고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음식 만들고 4시 반에서 7시까지 배식해요. 지난주 추석 연휴는 길었어요. 다른 시설은 다 문 닫는데 '안나의 집'만 문 열었어요. 명절에도 어디 갈 데 없는 사람들이 왔어요. 다른 날보다 두 배 이상 먹었어요. 힘들었지만 보람 많이 느꼈어요."

    한국어 발음이 아직 어눌했다. 그는 오블라티 수도회 소속의 '빈첸시오 보르도'라는 이탈리아 신부였다. 1990년 한국에 온 뒤 김대건 신부의 '김'에 '하느님의 종(하종)'을 붙여 '김하종'으로 개명했다. 서강대에서 2년간 어학 코스를 마치고 당시에 도시 빈민들이 많았던 성남으로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성당 부설 독거노인 점심급식소 운영했어요. 그 뒤 IMF 터지자 실직자 노숙인들 거리로 쏟아졌습니다. 제가 노숙인 무료급식소 만들려고 왔다 갔다 하자, 한 천주교 신자가 찾아와 '돌아가신 어머니 위해 뭔가 하고 싶다. 모란역 앞에 있는 건물의 3층 빌려드리겠다'라고 했어요. 그 어머니의 영세명이 '안나'였어요. 저녁 무료급식소로는 전국에서 처음이었어요."

    ―신부님을 만나러 오면서 솔직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어째서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르겠는데, 여전히 우리가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느냐, 세상에는 우리보다 훨씬 못 살고 도움이 절실한 나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성남에는 어려운 사람들 많았지만 노숙인을 위한 활동 없었어요. 처음 성남시청에 가서 도움 요구하니 '노숙인들이 어디에 있느냐' 답변했어요. 그때는 이런 활동 하는 외국인이 없어 저도 힘들었어요."

    ―이탈리아 신부라서 더 낯선 느낌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에도 노숙자·부랑아·집시·장애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한국에 오기 전 저는 로마에서 노숙인 봉사 많이 했어요. 저는 사제가 돼서 어려운 사람 봉사를 위해 성당에 소속되지 않고 오블라티 수도회에 들어갔어요."

    ―그 수도회는 당시 한국에 대한 부족한 정보나 선입견을 갖고 신부님을 파견한 게 아니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원했습니다. 고교 시절 한 친구의 권유로 인도의 타고르(1861~1941년) 시집 읽었습니다. 타고르를 통해서 간디, 힌두교, 불교, 중국, 일본, 한국 등으로 자연스럽게 관심 옮겨갔습니다. 대학에서는 동양철학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수도회 신부가 된 뒤 한국 가는 것 신청했습니다."

    ―한국과 중국, 일본 중 왜 한국이었습니까? 한국 친구를 사귀었습니까?

    "아니, 책만 보고 알았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 끌렸어요."

    ―한국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실학자들이 중국에 가서 천주학 서적을 몰래 갖고 들어왔지요. 선교사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경우이지요.

    "그런 역사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특히 순교한 김대건 신부(1821~1846년ㆍ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25세에 순교)가 매력적이었습니다. 또 '88 서울올림픽'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습니다."

    그는 로마 부근의 피안사노 출생이다. 아버지는 농부였다. 우르바노 대학을 나와 로마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198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왜 사제가 됐습니까?

    "선생님은 왜 기자 됐나요? 사람마다 제 갈 길 있지 않습니까."

    ―이탈리아 남자라면 로맨틱하거나 바람둥이 이미지가 있습니다. 진지한 신앙과 봉사는 금방 떠오르지 않습니다.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여러 종류 있어요. 저는 '난독증(難讀症)' 있었습니다. 학습 장애와 열등감으로 청소년기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이 저를 성숙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 사랑 많이 느꼈어요. 남들에게 그런 사랑 알려드리고 싶어 사제가 됐습니다."

    ―사제 서품을 받고 3년 뒤 한국에 오셨는데, 한국의 첫인상이 기대에 부응했습니까?

    "많이 실망했습니다. 저는 책과 사진 통해 한국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책을 보면 한국 사람은 한옥에 살고 한복 입습니다. 하지만 한옥 본 적 없고 콘크리트 건물이었어요. 한복 입은 사람 없고 대학생들은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다녀요. 불교 나라로 나와 있었는데 거리에서 스님 별로 본 적 없어요."

    ―처음 여기에 자리 잡았을 때 한국인들이 잘 대해주던가요?

    "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많았어요. 한국 사회에서는 노숙인을 돕는 걸 거절했어요. 처음 시작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제게 손가락질하면서 '당신 때문에 노숙인이 더 많이 생긴다'고 했어요. 욕 많이 먹었습니다. 여기에는 가족, 친구,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탈리아에 있는 지인들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 일로 이탈리아 지인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먹고살 만한 한국에서 왜 부탁하느냐'라고 반응하지 않던가요?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선(慈善) 많이 하고, 내가 무엇 때문에 돈이 필요한지 아니까 기쁘게 도와줬어요.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후원받은 걸로 운영했어요. 지금은 지자체 보조금 40%, 나머지 60%는 국내외 후원에 의존합니다."

    '이탈리아 신부' 김하종(오른쪽)
    ―경비가 얼마나 듭니까?

    "여기 '안나의 집' 말고 청소년 쉼터 4곳을 더 운영해요. 일 년에 20억원쯤 들어요. 물품 후원도 받습니다. 요일별로 가락시장과 빵 공장, 주변 학교를 돌며 부식 거리를 받아옵니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노숙인에 대해 '사지 멀쩡한데 왜 저렇게 살지' 하는 시선으로도 봅니다.

    "일거리 없어 노숙인 생기는 건 아닙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어렸을 때 버림받은 아이들이었어요. 결핍 가정에서 부모 사랑 받지 못하면 자신감 없어 사회생활 잘 못해요. 사랑을 받아야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걸 느껴요."

    ―우리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이들을 겪어보면 다를 겁니다. 이들에게 베풀었지만 오히려 돌아오는 것은 욕설과 거짓말, 폭력인 적이 없었습니까?

    "속이고 폭력 휘두르고 배신감 느끼게 하는 일들 있어요. 심지어 저를 고발한 사람 있었어요."

    ―가끔은 '이러려고 내가 이들을 위해 살고 있나' 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맞아요. 인간으로서는 그만하고 싶지만, 예수님 앞에서 못 한다고 할 수 없어요. '사랑하라' '어려운 사람 도와주라'고 했어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자녀들이니 세상은 한 가족입니다. 이들은 내 형제자매라고 생각해요. 불쌍해서 돕는 게 아니라, 인생에서 한번 넘어진 형제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손잡아주는 겁니다."

    ―베풀어서 그런 인간의 심성을 바꿀 수 있습니까?

    "바뀌는 사람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 있어요. 누구든지 마음속에 착한 부분 있어요. 우리의 역할은 이들 마음속에 '사랑' '희망' '용서'라는 올바른 씨앗 심는 겁니다. 좋은 마음 키울 수 있게요."

    ―그 성공 확률은요?

    "잘 자라서 열매 맺을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어요. 수십 년 뒤 어떻게 될지 나는 못 봐요. 하지만 지금 우리 할 일은 농부가 땅에서 하는 것처럼 씨앗 뿌리는 겁니다. 씨앗 뿌리지 않으면 아예 나무가 없어요. 특히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 잘못 없어요. 부모 잘못이지. 그 나이에는 따뜻하게 집안에서 사랑을 받고 자랄 권리 있어요. 이들이 도움을 받으면 올바른 사람 될 수 있고, 없으면 노숙인 돼요. 저는 일주일에 네 번 전철역 앞에서 작은 텐트를 치고 찾아가는 청소년 상담소 운영해요. 가출 청소년들에게 '잠깐 들어와 빵이나 라면 먹을래, 게임도 할 수 있어'라며 먼저 손 내밀어요."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해 요즘 한국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그때는 동네 주민들이 모여 함께 거리 청소했어요. 버스에서는 어른에게 자리 양보했어요. 나라를 위해 희생할 줄 알았고, '우리'라는 문화 있었어요. 이제 경제 발전하면서 '나'만 있어요. 나한테 이익 있으면 괜찮고, 없으면 안 돼요. 도덕, 윤리를 많이 잃어버렸어요. 그게 마음 아파요."

    ―이탈리아 사람은 인생을 엔조이하지요. 한국 사람은 어떻게 보입니까?.

    "이탈리아 사람 잘 노는 건 맞아요.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짧아요. 그 시간 지나면 행복하지 않아요. 한국 사람은 더 행복하지 않아요. 자살률 높고 출산율 가장 낮아요."

    ―어떻게 살면 행복해질까요?

    "요즘 한국 사람들 내 것, 내 시간, 내 공간, 내 소유물만 생각하니 불행해요. 행복의 비결은 나눔입니다. 나누는 만큼 행복해요.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 선물을 사주면 행복하지 않나요. 선물 주고서 손이 비는 순간 행복해요. 직장에서 피곤한 몸으로 퇴근해도 자녀 위해 좋은 것 줄 수 있으면 행복해지지 않나요. 엄마는 아기 키우면서 희생하지만 행복해요. 가정을 위해서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도 나눌 수 있어요."

    ―신부님은 늘 행복합니까?

    "저는 25년 동안 여기서 밥 지었는데 행복해요."

    ―인간은 유혹과 욕심에 흔들리기 쉬운 약한 존재인데요. 신부님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맞아요. 예수님 덕분에 이런 생활할 수 있어요. 저는 올해 환갑입니다. 피곤해요. 내년에는 여기 건물 임대 계약도 끝나요. 문 닫고 쉬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하지만 그만두면 이 친구들 어디서 식사합니까, 어디서 치료합니까. 그만두느냐 계속하느냐, 갈등 많았어요. 결국 새집 짓기로 했어요. 어디서 돈 마련해야 하나 걱정 들었지만 지금 잘되고 있어요. 건강 허락될 때까지 해보기로 했어요."

    그는 2014년 호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귀화하면서 '장기 기증서'와 '사후 신체 기증서'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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