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漢字 알고 '한글 전용' 해야지, 모르고 하면 맹탕… '현대판 文盲' 확산"

    입력 : 2017.10.09 03:02 | 수정 : 2017.10.09 18:38

    [한글날에 '한글 전용'을 생각하다… 전광진 성균관대 교수]

    우리 사회에서 '漢字' 얘기하면 시대착오적 수구주의자로 여겨
    지식 전달과 수용의 영역인데 세대·이념 논쟁처럼 변질돼

    '대회전' '진검승부' 같은 단어에 "일제 잔재" 민감 반응 보이지만
    '사회' '자유' '개인' '철학' 등 일본식 한자어엔 많이 의존해

    "포장지만 아는 사람과 속까지 아는 사람 중 어느 쪽이 지력(知力)이 더 뛰어나겠습니까. '한글날'에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한글 전용(專用)으로 '현대판 문맹(文盲)'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자를 알고 한글 전용을 하면 괜찮은데, 모르고 하면 맹탕이 됩니다. 무식한 사람이 더 무식해집니다."

    전광진(63) 성균관대 교수는 작심한 듯 말을 쏟아냈다. 연휴(連休)라 건물 내 다른 연구실에는 인적이 없었다. 그의 전공(專攻)은 중국어다. 하지만 그는 한글 세계화 관련 논문과 '우리말 한자어 속뜻사전'으로 더 알려져 있다.

    "한글 전용을 하면 읽기는 쉽습니다. 읽고는 단어의 뜻을 대충 짐작해버립니다. 사실은 그 뜻을 모르는 게 대부분인데, 안다고 착각하고 지나가는 겁니다. 이게 한글 전용의 폐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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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진 교수는 “기자들은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하지만 ‘전치’가 무슨 뜻인지 실제 잘 모른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한글 전용과 한자 혼용(混用)을 두고 70년간 대립해왔습니다. 한글 전용은 이미 대세이고 되돌릴 수 없다고 봅니다. 더 이상 논의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일지 모릅니다.

    "1948년 미군정청 훈령이 한글 전용의 발단이 됐습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저도 느낍니다. 하지만 한글 전용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정확히 따져보지 않습니다. 우리말의 70%가 한자어로 되어 있습니다. 의미 있는 알맹이는 거의 모두 한자어입니다. 한글 전용은 한자어나 외래어라 하더라도 24개 한글 자모(子母)로만 표기하는 방식입니다. 속(내용)이 무엇이든 한글로 포장하자는 것입니다."

    ―한글 전용으로 문맹률은 거의 제로가 됐지 않습니까?

    "세종대왕은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자신의 뜻을 글로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쓰기에 편리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종의 이런 이상(理想)은 이제 실현됐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글 전용으로 전반적인 '지력 하락(知力 下落)' '지식의 하향평준화'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지력 하락'으로 단정하는 게 맞을까요?

    "글을 읽을 줄만 알지, 독해력과 어휘력, 이해력, 사고력은 떨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학생이 '교수님 새해를 맞이하여 명복을 빕니다'라고 신년 연하장을 보내왔습니다. 어떤 학생은 '우리 아버지는 향년 64세입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문서 결제'나 '자금 결재'라고 그냥 씁니다. 단어의 정확한 뜻을 모르고 사용하는 겁니다. 한자어가 암호(暗號)처럼 된 겁니다."

    ―좀 과장된 사례 같군요.

    "제가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애국가 1절에 나오는 한자어 10개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조사를 해봤습니다. 평균 30~40점밖에 안 나왔습니다. '동해'는 동쪽에서 뜨는 해, '백두산'은 백 개의 산, '삼천리'는 자전거 상표로 알고 있습니다. 한글은 읽기는 쉽지만 뜻을 알게 하지 못합니다. '눈 뜬 소경' 격입니다. 이런 사례는 학생들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학부모 대상 특강에서 '이유식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라고 물으면 답변을 못 합니다."

    ―자녀를 키워봤으면 왜 모르겠습니까?

    "젖을 뗄 때 먹이는 걸로 알고는 있겠지만 그게 왜 '이유식(離乳食)'이란 단어를 쓰는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전체 문장의 맥락에서 단어의 뜻을 통상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문장 속에서 뜻을 알게 되는 게 '문맥 접근법'입니다. 이는 밥을 꼭꼭 씹지 않고 그냥 삼켜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소화불능이 됩니다. 가령 기자들은 의례적으로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었다'는 식의 사건 보도를 합니다. 보도는 그렇게 하지만, '전치'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기자나 독자들도 잘 모릅니다. '완전할 전, 다스릴 치(全治)'라는 한자를 알면 '아 그렇구나' 합니다. 이게 '단어 형태 분석법'입니다. 단어에서부터 분석적 사고를 하게 됩니다."

    그는 2007년 우리말 한자어 5만8000여 개의 속뜻을 담은 '우리말 한자어 속뜻사전'을 편찬했다. 어떤 한자어가 왜 그런 뜻을 갖게 됐는지 한자(漢字)를 한 자 한 자 풀이해놓은 것이다.

    "사실 10년 전 오늘이 사전이 간행된 날입니다. 당시 출판사 6곳에서 모두 퇴짜 맞았습니다. 제 아파트를 담보로 1억5000만원을 대출받아 직접 출판사를 차려 펴냈습니다. 예상밖에 학부모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그 뒤 '속뜻 국어사전'도 편찬했습니다. 지금까지 둘 합쳐서 15만부나 팔렸습니다. 재작년에는 '속뜻사전' 앱을 개발해 무료 보급하고 있습니다."

    ―중국어 전공 교수가 사전 작업까지 하게 됐습니까?

    "제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수학교과서에 나오는 '등호' '타원' '산포도' 같은 용어를 질문해왔습니다. 국어사전에는 '둘 이상의 수나 식이 서로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 '평면 위의 두 정점으로부터의 거리의 합이 일정한 점을 이루는 위치' '도수 분포의 모양을 조사할 때에 변량의 흩어져 있는 정도를 가리키는 값'이라고 나옵니다. 그런 정의가 아이에게 이해될 리 없지요. '등호(等號)는 같을 등, 표지 호이니 같음을 나타내는 표지다' '타원(楕圓)은 길쭉할 타, 둥글 원이니 길쭉한 원이다' '산포도(散布度)는 흩을 산, 펼 포, 정도 도이니 흩어져 펼쳐 있는 정도다'라고 설명하면 더 잘 알아들었습니다."

    ―결국 한자를 상용하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인가요?

    "옛날처럼 한자를 쓸 줄 아는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 한자로 변환되니까요. 이제는 한자 형태를 보고 뜻이 무엇인지 알면 됩니다. 고교 졸업까지 2000자(字)만 배우면, 한자끼리 결합으로 400만개 단어를 알 수 있습니다."

    최보식 선임기자와 전광진 성균관대 교수

    ―교육부가 2019년부터 초등 5·6학년 교과서에 사용할 한자 300자(字) 표기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한글단체와 특정 교원단체에서는 학습 부담 증가, 부작용 등의 이유로 반대하고 있지요?

    "시험에는 출제하지 않겠다는 단서까지 달았습니다. 어려운 낱말에 대해 각주(脚注)처럼 풀이해주는 것인데 왜 반대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요즘 초등학생은 영어는 물론이고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지요. 한자까지 더 배워야 한다면 부담은 되겠지요.

    "정작 그 나이에 해야 할 교육이 한자 학습입니다. 공교육에서는 한자 교육을 안 하지만, 이미 사교육 시장에는 수백 종의 한자학습서들이 나와 있습니다. 한자를 안 가르치면 자녀의 어휘력, 분석력 등이 뒤떨어진다는 걸 학부모들은 알기 때문입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한글 전용의 대표적 인물이지만 그 자제분과 따님에게는 한자 공부를 시켰던 걸로 압니다. 그렇지 않고 자제분이 어떻게 의학박사가 됐겠습니까."

    ―괄호 속의 한자 병기(倂記)까지 반대하는 것은 저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한자를 배워야 한다고 하면 시대착오적인 수구주의자로 여깁니다. 이는 지식 전달과 수용의 영역인데도 세대·이념 논쟁처럼 됐습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한자 얘기를 꺼내면 '보수 꼴통'으로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사대주의자'로 공격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자어도 우리말이라는 점입니다. 한글이 숟가락이면 한자는 젓가락과 같은 겁니다."

    ―한자어나 외래어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돌아봐야 할 대목입니다. 이들 언어가 편입돼 어떤 면에서 우리말을 더 풍성하게 해줍니다.

    "나라 간에는 인적·물적 교류를 하기 때문에 외래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없다면 폐쇄국가인 것이죠. 우리는 '한글날'을 제정해놓았지만, 한글이 무엇인지 정확한 개념을 모릅니다. 한글은 24개 자모(子母) 체계입니다. 영어로는 '코리언 알파벳(Korean alphabet)'이지요. 이를 '한국어(Korean language)'로 혼동하고 있습니다. 한글은 한자와 함께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입니다."

    ―한글은 우리가 내는 소리 중에서 의미와 관여되는 모든 요소에 분명한 형태(子母)를 줬지요. 이는 현대 언어학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획기적인 발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글과 한국어는 동일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종대왕께서 만든 한글 사랑을 위해 은어·비속어·외래어를 쓰지 말자'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순우리말을 지키는 것은 국어의 문제입니다. '한글 사랑'이 아닌 '국어 사랑'이라고 해야 합니다."

    ―물론 고유어(토속어)를 찾아내고 되살리려는 노력도 소중합니다. 작가 이효석(1907~1942)의 소설에 나오는 어휘들이 그런 예이지요. 하지만 언어는 세태를 반영하고 바뀌어갑니다. 대중의 수용 여부에 따라 도태되고 생성되고 편입되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지난 시절의 고유어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비현실적인 면이 없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한자어를 토속어로 바꿔보려고 했지만 크게 성공한 것 같지 않습니다. 국어학자나 관료들이 바꾼다고 해도 대중에게 쓰여야 언어가 되니까요."

    ―우리말 속에 있는 일본어 문제도 그렇습니다. 가령 신문 기사에 '대회전(大會戰)' '진검승부(眞劍勝負)' '입장(立場)' 같은 단어를 쓰면 '일제 잔재'라고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독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회(社會)' '자유(自由)' '개인(個人)' '철학(哲學)' 등도 사실은 일본식 한자어입니다.

    "동감입니다. 과거사 때문에 이해는 되지만 언어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좀 더 개방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언어는 의사소통과 지식 습득의 도구이지, 이념과 애국심을 표방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집안 형편으로 경북 김천의 상고를 졸업한 그는 한국은행에 다니면서 성균관대 야간에 진학했다. 그 뒤 국립대만대에 유학해 석·박사를 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흙수저'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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