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 혁신이 어찌 혁신이랴

  •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입력 : 2017.10.09 03:17

    혁신 성장은 별책부록 아니야…
    노동, 자본의 유연성이 핵심 되고 허약한 체질부터 개선해야 진짜인데
    양대지침 폐기로 오히려 돌 얹고 노동개혁 언급 없는 혁신은 말 잔치
    고통을 직시하고 나눌 방안 필요해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윤희숙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혁신 성장의 개념을 조속히 정립하고 집행 전략을 마련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추석 연휴 후에는 혁신 성장에 박차가 가해질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한 각계의 반응도 호의적이며 개인적으로도 반갑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이제 4개월 남짓이니 지금이라도 경제정책을 체계적으로 수립해 매진한다면 늦은 게 아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묵직한 근심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도 사실이다. 혁신 성장이라는 것이 새 정부의 다른 정책들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외면하고 마치 경제 시스템의 나머지 부분과 동떨어진 섬인 것처럼 국지적 방안만 내밀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데도 정책 수립자들이 자주 망각하는 것이 있다. 경제 혁신이 단지 신기술이나 창업의 증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혁신 성장 전략이 전모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부분적이나마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창업 지원이나 R&D 지원, 클러스터 육성 등의 내용으로 혁신 전략이 채워진다면 체질이 약화될 대로 약화된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혁신이란 이름의 별책 부록을 더 얹는 것만으로 경제 체질을 쇄신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과 같다.

    정반대로 혁신 성장의 본질은 기존의 익숙한 생산 방식과 자원 배분이 변화하는 것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촉진하는 경제 시스템이다. 즉, 새로운 아이디어가 가리키는 가능성을 향해 노동력과 자본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시스템이며, 이는 기업 스스로 덩치나 생산 방식, 고용 형태를 조정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은 혁신 능력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지만, 쇠락하는 기업이나 근로자 개인에게는 기업이 망하고,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 불안정성이니 결국 고통이다. 그렇다고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고용과 자본을 조정할 여지를 제거해버리면 기업과 일자리가 태어나고 흥하고 망하는 생태계를 정지시키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 중심의 경제를 구현하는 것은 실패의 위험과 탈락의 고통을 용인해야 한다는 점에서 순탄치 않은 길이다. 탈락자의 소득을 지원하고 재진입을 적극 돕는 것만이 대안이지만, 이를 모두가 쉽게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미 시장 안에서 안정적 위치를 차지한 이들로서는 기업의 고용 조정이 곧 기득권의 위협을 뜻하니 결사 항전의 자세로 저항하게 된다.

    9월26일 국회에서 진행된 미래 성장 경제정책 포럼 조찬 세미나에서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강연하고 있다. 김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소득 주도 성장과 일자리 중심 성장, 사람 중심 성장을 합친 혁신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시스
    그러니 혁신 생태계를 구축한다면서 아무런 개혁도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빈말일 가능성이 크다. 심화되는 경제 전쟁 속에서 우리처럼 자원이 희소한 소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가 몸 가볍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하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 이 점을 털어놓지 않으면서 혁신 경제가 어떻게 가능할까.

    며칠 전 저성과자 퇴출과 취업 규칙 변경에 대한 양대 지침이 폐기됐다. 이전 정부에서 추구했던 노동 개혁 내용을 수정하고 개선하는 조치의 일환이면 좋으련만 노동 개혁 자체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비정규직 고용은 사유를 제한하겠다고까지 한다. 이런 조치들은 노조의 뒷받침과 대기업의 안정적 전망 속에 이미 버젓한 일자리를 확보한 그룹에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 속에서 살길을 터야 하는 과제에는 거대한 돌덩어리를 위에 얹는 것과 같다.

    일자리 창출을 최대 과제로 인식하는 선진 각국은 기업가들이 채용을 겁내지 않도록 규제를 줄여 일자리를 늘리는 전략을 추구한 지 이미 오래다. 특히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정규직보다 못한 다양한 형태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대우를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두어 왔다. 2000년대 초반 독일 하르츠 개혁의 핵심은 비정규직 고용에 관한 규제 완화였고,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사활을 건 최근 개혁안에서도 이는 해고 규제 완화와 함께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진보적 노동경제학자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티토 보에리 교수는 2012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비정규직을 막는 것은 자기 발등을 권총으로 쏘는 것과 같다'고 단언했다. 질 낮은 일자리가 양산되는 것을 결코 환영할 수 없으나 이들을 규제함으로써 기업이 고용 자체를 회피하게 될 것을 우려하는 정책 연구자의 절절한 고민을 토로한 것이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인 각국의 고용정책 흐름은 가볍게 무시할 만한 일시적 유행이 아니다.

    연휴가 끝난 후 발표될 혁신 성장 전략은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는 듣기 좋은 계획만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닥친 어려움과 문제점을 허심탄회하게 밝히고 고통 분담의 방향과 방안을 담은 내용이기를 기대한다. 혁신의 시작은 자신의 비계와 굳은살을 깎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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